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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답지의 산책자
황정인(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
밤새 눈이 내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들판에 발자국을 찍듯이, 얇고 섬세한 선들이 하얀 종이 위를 날렵하게 가로지르면, 검은 형상들이 금세 화면을 꽉 채운다. 펜촉을 통해 종이의 담백한 표면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것은 사람의 형상이었다가 도깨비의 형상으로, 새였다가 바다로, 숲이었다가 다시 유령으로, 책이었다가 괴물로, 원숭이였다가 화가의 자화상으로, 알 수 없는 상징들의 무한한 연쇄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전시장 한 층을 가득 매운 수많은 드로잉은 책이라는 느슨한 연결고리를 통해서도 따로 또 같이 저마다의 의미를 전한다.
‘산책자 노트’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우정수의 세 번째 개인전은 지금까지 그가 관심 갖고 지켜본 세상의 이면, 그 안에서 목격한 인간의 본성과 한계, 그리고 한 개인이자 화가로서의 역할에 대한 심리적 고민의 흔적들을 170여장의 드로잉과 이것을 다시 여덟 개의 작은 주제로 엮은 책으로 살펴보는 자리다. 우정수는 본격적인 페인팅을 위해 일반적으로 행하는 스케치의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종이 위에 직접 붓으로 형상을 그려나간다. 얼핏 보면 그것이 쉬워 보일지 모르나, 종이와 잉크가 그 특성상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민감한 재료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번 전시에 소개된 펜 드로잉이 갖는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드로잉을 통해 여러 가지 도상을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며, 그것을 다시 여러 상황 속에서 대입하여 다양한 이야기의 구조를 만들면서 자신의 독특한 화법을 형성해왔다. 수없이 많이 생각하고, 그것을 다시 드로잉으로 수차례 표현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인지, 그의 그림에서는 망설임 없이 그어낸 붓질이 자체가 형상에 힘을 실어준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기법의 숙련도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태도에서 기인한다. ‘산책자(Flàneur)’라는 단어의 의미처럼, 그는 오늘날의 사회라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한 개인으로서의 독립적인 시선과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전시에서 소개된 드로잉을 엮은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동안 그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지난 10년간 변화해 온 사회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거기서 벌어지는 사회의 크고 작은 사건들, 견고한 사회의 시스템 아래 순응하거나 반대하는 움직임, 인간의 믿음과 불신이 작동하는 순간들을 희화화된 인물과 동물의 모습, 그리고 괴기한 풍경에 담았다. 작가는 검은 잉크를 이용하여 이것을 빠른 필치로 그려나가면서도 섬세한 묘사를 놓치지 않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중심에는 그가 책을 통해 경험하며 쌓아 올린 오랜 사고의 훈련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신화와 민담에 관한 이야기, 영웅과 위인들의 전기, 사상가들의 철학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을 부지런히 읽어가면서 현실 세계의 시스템이 구축되어 작동하는 방식과 그 안에서 반응하는 인간의 삶과 본성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진실을 향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수많은 양의 지식과 정보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현실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믿음’과, 한편으로는 그것이 인간의 과욕과 사회의 다양한 변수들이 야기하는 시스템의 예측불가능성으로 인해 눈앞에 닥친 현실을 쉽게 변화시키기는 어렵다는 ‘의심’이 공존하게 된다. 그 안에서 작가는 한 사회에 속한 개인이자 화가로서 과연 어떠한 자세로 살아갈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고민하였고, 그 결과는 각각 2015년 첫 개인전인 ‘불한당의 그림들’과 2016년 두 번째 개인전인 ‘책의 무덤’을 통해 자리한다.
작가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일들이 정당화되어 한 사회의 질서를 그럴듯하게 구축해가는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이미지를 끝없이 생산하는 화가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거나(‘불한당의 그림들’), 지식과 문명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이러한 세상을 구원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회의적인 시각(‘책의 무덤’)을 내비추기도 했다. 시간의 흐름을 두고 보면, 그는 불가항력적인 사회 시스템으로 무장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느낀 분노의 감정을 고백하듯 날 선 발언으로 솔직하게 그려내는 것에서 출발하여, 유한한 존재로서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과잉된 욕망과 감정으로 점철된 인간의 모습을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사회나 난파된 문명 속에 투영하여 냉소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화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을 항상 그림의 주요 화두로 염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책에서 직접적으로 ‘엉터리 화가’라고 이름 붙여진 장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장에서도 간혹 모습을 드러낸 화가의 초상에는 그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사회 안에서 화가의 존재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늘 은유적으로 담겨있다. 그림 속에서 화가는 ‘그린다’는 행위를 통해 그 역할을 강요받기도 하지만, ‘그리는’ 행위를 통해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도 한다. ‘산책자’가 사회의 무리 혹은 집단 속에 거하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독자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는 양면적 존재라고 할 때, 우정수의 그림에서는 그러한 산책자의 양가적 시선이 세상을 향해서도, 화가인 자신을 향해서도 유효한 듯하다.
이렇게 화가로서의 자기비판적이고 자기성찰적인 태도는 그림의 소재로 직접 등장하는 것을 넘어, 기존의 작업에서 고수해 온 화면구성 방식에 작은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우로보로스 #1>(2017)에서 자신의 꼬리를 잡아먹으면서 태어나는 고대 신화 속 존재인 우로보로스(uroboros)를 원형의 온전한 형태로 제시하던 것에서 나아가, 작가는 원형의 순환구조에서 보이는 완전성과 전체성을 해체하고 부정하면서 그 사이로 전혀 다른 맥락의 상황들을 과감하게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전시의 또 다른 층을 구성하는 <우로보로스 #2>(2017)는 마치 잃어버린 퍼즐 조각처럼 완벽한 원형의 구조에서 벗어난 채 몸통이 잘려나가 있으며, 그 주변으로는 예측불가능한 자연의 에너지와 초월적 세계를 나타내는 종교적 도상들, 자연을 거스르기 위한 인간의 욕망, 이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상징들이 뒤섞여 있다. 금방이라고 잡아먹을 듯 덤벼드는 우로보로스의 맹렬한 기세 아래로 성모마리아의 온화한 미소가 번지며,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맹위 안에서도 꽃은 아름답게 피어난다. 이것은 ‘불한당의 그림들’에서 화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그림이 화가를 위한 가면으로 흘러가거나, ‘책의 무덤’의 대표작 중 하나였던 <서사의 의무>(2016)가 공간 전체를 회전하듯 부유하는 문명의 상징들을 하나로 아우르며 유지했던 거대한 순환구조를 대조적으로 상기시키는 지점이다.
아울러 종이에서 나무 패널로 그림의 재료를 달리하면서 가능하게 된 표현법도 이러한 순환을 역설하는 요소가 된다. 종이 위에 이미지를 그리고 하나의 층위를 수평적으로 확장시켰던 방식은, 나무 패널과 먹의 농담을 이용한 최근의 작업에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림 위에 먼저 그려진 이미지를 다시 부정하듯 지우거나 옮기고, 이미지 층을 얇게 쌓아 올려 이미지 간의 전후 관계를 드러내는 방식은 이미지 간의 관계를 더욱 복잡한 다층구조를 형성한다. 여러 개의 나무 패널로 분절된 화면 구성도 이미지 간의 연결성에 집중하기보다는 개개의 화면이 지닌 의미들이 가로로, 세로로 우연히 만나고 충돌하는 상황을 연출하여 적극적인 감상과 해석의 개입을 가능하게 한다. <서사의 의무>와 같은 기존의 작업이 완결된 하나의 순환구조와 상징적 도상들이 만들어 낸 단단한 화면구성을 통해 대상에 대한 작가의 시각을 명확하게 제시했다면, <우로보로스 #2>는 기법과 화면 구성의 가변적 특성으로 인해 대상에 대한 관객의 해석과 경험을 작품 감상에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로 끌어들인다.
이러한 특징은 전시에서 소개된 책에서 여덟 개의 다른 구성들이 서로 간에 맺고 있는 느슨한 연결 관계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무거운 나무’, ‘바보들의 왕관’, ‘이상한 이야기’, ‘책의 무덤’, ‘오리엔탈이 되는 법’, ‘유령의 얼굴’, ‘엉터리 화가’, ‘산책’이라고 이름 붙여진 각각의 장은 결국 그가 혼란스러운 사회 현실 속에서 한 개인이자 화가, 산책자로서의 역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 실존적 고민의 흔적들을 은유적으로 담아낸 일종의 이미지 고백록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장을 구성하는 드로잉들은 오래전부터 대상에 대한 생각과 표현의 원형으로 자리하다가, 전시와 만날 때는 전체적인 이야기를 끌어가는 구심점으로도 그 역할을 해왔다.
여전히 작가는 폭력과 광기의 야만성과 구원과 희생의 신성함이 공존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산책자이길 자처하며 그림 그리는 손을 멈추지 않는다. ‘책의 무덤’을 통해 현실 세계를 향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감정의 문제를 얘기했음에도 그가 보낸 시간과 고민의 흔적은 다시 그림으로 가득한 책의 형태를 갖추고 관객에게 말을 건넬 준비를 마쳤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통해 전해지듯이 인간은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 하나의 작은 점에 지나지 않을 순간의 삶을 사는 존재일지 모른다. 하지만 길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산책자에게 세상은 아직 알 수 없는 일들이 가득하고,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수많은 선택들이 기다리고 있는 미답의 영역임에는 틀림없다.

Passing Through The Insid
이소영 Lee So-Young
작가노트
내부를 통과하기 Passing Through The Inside
객관성을 대표하는 실제건물의 축소모형을 만들고 사진 촬영하여 주관성을 상징하는 개인 물품이나 작품을 겹쳐서 하나의 장면으로 표현하던 기존의 작업 방식에서 2011년 이후 나의 관심은 좀 더 건축 공간 자체를 해석하고 드러내는 것으로 이동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복도나 계단 같은 통로의 성격을 가지는 것에 관심이 있다. 통로는 지점과 지점을 연결하는 흐름의 역할을 하는, 머무르지 않는 장소이다. 중심도 외곽도 아닌 중립적인 장소인 통로는 언제나 유동적인 가능성으로 어디로든 열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통로의 끝에는 정말 도달해야만 하는 최종 목적지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단 하나의 목적지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는다면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통로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지하철은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거대한 통로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하철 역사 안의 통로를 모형으로 만들어 작업하였다.
출구와 출구를 연결하는 긴 복도와 계단을 중심으로 보여 지는 지하역사 내부의 풍경을 그렸다. 출구 번호와 지명, 평면도나 지도 등 기호의 도움으로 목적지를 결정해야하는 그 곳에서 나는 늘 길을 잃을 것 같아 약간 긴장한다. 갈림길마다 갈등하고 판단하고 선택을 반복한다. 그렇게 도달하게 된 출구의 모습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제작했다.
갤러리 룩스는 2층과 3층으로 전시 공간이 나누어져 있다.
2층에는 위에서 언급한 이미지 작업을, 3층에는 입체와 소리 작품을 전시할 계획이다.
3층에는 ‘끊임없이 둘로 갈라지는 복도’라는 제목의 입체 작품이 중앙에 배치되고 지하철 출구에서 들리는 외부의 소리를 녹음 편집한 음향이 들리도록 구상하였다.
지상의 실체를 가진 목적지에 도달하기 바로 전까지의 물리적 또는 심리적 여정을 표현하였다.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 바로 그 통로이기 때문이다.

NEUTRON SaTAR
사타 SATA
작가노트
NEUTRON SaTAR
중성자 별은 초신성이 폭발해서 남은 중심 핵이다. 별의 진화 단계에 포함되기 때문에 ‘별’이라 부르지만 사실상 중성자 별은 스스로 핵융합을 일으켜 열과 빛을 내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무수한 시체 별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부주의한 사고로 인해 작업해왔던 사진과 아직 가공되지 못한 사진, 상당한 사진들이 손실됐다. 관리를 잘못한 죄책감, 시간과 공을 들여 축적했던 자산이 사라진 듯한 상실감으로, 얼마 동안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머릿 속은 뜨거워졌고, 이러다 터질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될 정도로 혈압이 느껴졌다.
그러다 희미하게 어떤 이미지 하나가 연상되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촬영한지도 모를 이미지가 차츰 양쪽 미간을 점령해 가기 시작했고, 허겁지겁 그 이미지를 스케치하듯 메모를 남겼다.
그러나 곧 다른 사진들도 연이어 떠오르고 삽시간에 머리를 채워 나가며 여러 이미지들은 계속 중첩됐다. 어느 순간 메모 하는 것을 멈추었다.
마치 돔 형태의 내부에 이미지가 벽지처럼 가득 차 흡사 둥근 형태의 공처럼 실체 없는 내가 머릿속 가운데에서 기억조각들이 하나의 장면처럼 합쳐진 상황을 마주하고 있었다.
기억이 회전하는 것인지 나의 중심이 돌고 있는 것인지. 장면들은 또 다른 무수한 새로운 조각들로 이루어져 점점 빠른 속도로 시감(時感)을 지나가고 있었다.
어지러움을 느껴 눈을 떴다고 느꼈을 때, 돔의 외벽은 허물어 졌고, 동시에 멈춰있던 메모를 하던 손이 무엇인가 적고 있었다.
‘사라진 게 아니다’
한 두번 열람으로 읽혀져 얇게 저장된 기억을 긁어 올리는 신경들에 감사하며, 그러다 뜻하지 않게 느껴지는 잔상에 당시 감각들에 전율하며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부주의한 사고가 났을 무렵, 어떤 식으로든 데이터는 터져 가며 붕괴했을 것이고, 사라져간다고 느꼈을 나의 뇌의 일부분이 극적으로 반응해서 본능적으로 어느 시점들의 기억들을 저 너머에서 퍼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들이 똑같이 사라질 것이라고 순간적으로 믿어버리고, 다급하게 기억들을 소환한 뇌신경의 작용은 본능이라고 밖에 설명 할 수가 없겠다.
중성자 별은 너무나 강력한 중력 때문에 중성자 별을 탈출하려면 빛보다 3분의 2는 빨라야 한다. 아무리 단단한 물체도 중성자 별 표면에 닿기도 전에 조석력으로 인해 가루가 되어 분해 될 것이다. 이때 물체는 시속 1억 킬로미터로 가속되어 낙하하게 되고, 이 정도의 속도면 원자핵이 부숴져 핵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
중성자별의 강력한 중력은 빛을 휘게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휘어진 빛은 멀리서 보면 마치 렌즈처럼 볼록하게 보여진다. 이를 중력렌즈효과라 하고 이를 이용해 망원경으로 관측하기 힘든 멀리 있는 천체를 생각보다 가까이 관찰 할 수 있다.
중력 주위 띠 모양으로 분포하는 가스층과 빛이 만들어낸 렌즈효과는 핵만 존재하는 중성자 별을 몇 배 이상 더 큰 입체적인 별로 보여지게 한다.
초신성의 폭발은 데이터 사고를 예시로 일어나는 장면이며, 초신성이 폭발할 때 주변은 아름답게 빛난다.
중심의 핵은 데이터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죽은 나 혹은 나 자체로 대입 할 수 있다. 동일한 상황에서 초신성이 폭발하는 순간 중심의 핵과 외부 표면들 사이 산화하는 입자들, 즉 나와 사라져가는 기억과 그 사이의 감정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무수하게 사라져간 기억들 현재의 감정들 미래의 염원들 모두는 한 공간에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정보들을 중첩시키고 나를 중심으로 자전하는 우주의 일정한 궤도 안착시킬 때, 나는 몇배 이상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사라져 가는 것들 잡히지 않는 현재 알 수 없는 미래에 관해 두려워하지 말자.
나는 사라져 가거나 살아있거나 다시 살아날 우주이므로.

A STORY WITHOUT A STORY
권순영, 우정수, 전현선
이야기 있는/없는 그림
박은혜(갤러리룩스 큐레이터)
“왜 세계의 윤곽을 그리는 일은 색으로 세계를 뭉개는 일보다 항상 덜 슬픈가”
(김상혁, 「십일월」,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문학동네, 2016)
세계는 일정한 서사 구조에 의해서 구축되었고, 역사로 기술되어 왔다. 서사 구조는 사건들이 발생하는 시간적 순서를 따른다. 평형 단계-출발 단계-진행 단계-종결 단계, 이후 다시 평형 단계로 되돌아간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단조롭던 상황이 어수선해지고 복잡해진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은 절정을 향해 나아가고 그 이후에는 거짓말처럼 사건은 일단락되고, 다시 정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다.
사실 세계의 윤곽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세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서사를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이렇게 이야기로 남겨질 수 있는 것은 사건이 이미 해결되었거나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셰에라자드1)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이야기를 지연시켰던 것처럼, 이야기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세계는 그렇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편 이야기는 여러 감정들과 맞닿아 있는데, 세계는 그렇게 복합적인 작용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은 기쁨의 순간으로 전복되기 하며, 광기 어린 집착은 불안한 감정을 조장하고,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사건은 긴장감을 지속시키기도 한다.
«A STORY WITHOUT A STORY 이야기 없는 이야기»는 화면 속에서 서사 구조를 만들어 세계를 연출하고, 감정의 상태를 재현하는 방식의 작업을 진행해왔던 권순영, 우정수, 전현선의 작업으로부터 출발했다.
권순영은 고통스러웠던 자전적 이야기를 기반으로 아름답고 즐거웠던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이미지를 투명한 색감으로 재현해왔다. 큰 눈동자를 가진 여러 형상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들은 서로에게 무언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소 가학적인 형상들이지만, 이들의 작고 섬세한 몸짓과 표정은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유희적 시공간으로 전복시킨다.
우정수는 구조적 차원에서 발견되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추적하며, 이를 불안한 혹은 불온한 이미지를 그려왔다. 불가항력적인 세계의 모습을 ‘적대’의 차원에서 접근하며, 혼돈스러운 이미지와 모순적인 이야기(들)을 발견하게 한다. 흑백의 대비되는 색감, 신경질적인 드로잉 선, 그리고 그림 속의 이야기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중첩은 불안한 정서를 극대화시킨다.
전현선은 정체불명의 ‘뿔’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가상의 이야기를 확장시키며, ‘뿔’의 정체와 기능, 그것을 둘러싼 사물과 인물의 반응들을 재현해왔다.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지속시킨다. 최근 동료 작가와
공동 작업을 하며 ‘뿔’ 혹은 ‘뿔과 같은 형태’에 대해서 타인과 대화하기를 시도했다. 화면의 중심을 차지했던 ‘뿔’이 이곳저곳에 불쑥 등장하면서 화면 속 입체 감각이 평평해지고, 서사 구조 또한 이미지로 전환되고 있다.
한편 전시는 동어반복적인 전시 제목처럼 그 출발점으로부터 역행하게 된다. 세계와 감정이 배제된, 서사구조가 없는, 이야기가 없어진 그림들이 전시의 또 다른 축이 될 것이다. 이야기 있는/없는 그림은 우리의 상상력이 불완전한 영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렇지만 그것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것이다.
“이미지에서 중요한 것은 (…) 이미지가 포획하고 있는 폭발 직전의 강렬한 에너지2)”이기 때문에.
권순영은 상징이 부유하는 정물을. 우정수는 시공간을 박제하는 바로크 시대의 꽃을. 전현선은 격자무늬에 감정 없는 사물을.
1) 셰에라자드는 아라비아 설화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를 술탄 샤리아르 왕에게 매일밤 들려주었던 페르시아의 전설적인 왕비이다. 술탄은 아내의 부정으로 인해 모든 여자를 신뢰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이후로 첫날 밤을 보낸 이후 모든 신부를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셰에라자드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술탄의 관심을 끌었고, 그녀는 매일 밤 이야기를 끝맺지 않아서 다음날까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끝 없는 이야기 때문에 술탄은 결국 자신의 맹세를 포기하게 된다.
2) 질 들뢰즈, 이정하 옮김, 『소진된 인간』, 문학과 지성사, 2013, p. 13.

뉴 모노크롬: 회화에서 사진으로
박상우 PARK Sangwoo
세속의 세계로 내려온 모노크롬 사진
박평종(미학, 사진비평)
사진이론가 박상우의 모노크롬 사진전은 몇 가지 측면에서 주목을 끈다. 우선 현대미술과 사진이론 분야에서 풍부한 텍스트를 생산해 온 연구자의 개인전이라는 점, 최근 한국미술의 한 복판에서 다시 논의되고 있는 이른바 ‘단색화’와 맞물려 있다는 점, 모노크롬을 사진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연구자의 개인전을 ‘특별한’ 사안으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창작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연구자’ 박상우는 사실 오랫동안 집필과 창작활동을 병행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이 이론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히려 이 전시에서 주목할 키워드는 ‘모노크롬’과 ‘사진’이다. 왜 모노크롬인가? 나아가 왜 사진인가? 이 질문에서 시작하기로 하자.
21세기의 초입에 모노크롬을 ‘예술작품’으로 제시하는 행위는 낯설다 못해 엉뚱해 보일 정도다. 왜냐하면 이미 모노크롬은 20세기 아방가르드예술의 무수한 ‘실험’을 거쳐 미술사의 ‘자료’로, 즉 과거의 유물로 전락한 측면이 짙기 때문이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에서부터 추상의 극단을 향한 운동으로서의 모노크롬이 있다. 라인하트(Ad Reinhardt)의 ‘블랙 페인팅’이 있고, 라이만(Robert Ryman)이나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의 ‘화이트 페인팅’도 있다. 이브 클렝(Yves Kein)에게 ‘IBK’라는 청색 모노크롬이 있다면, 만조니(Pierro Manzoni)에게는 ‘Achrome’이라는 비색화(非色畵)가 있다. 사실 20세기는 모노크롬 회화의 전성기였으며, 심지어 그 경향은 19세기부터 있었다. 그토록 다양한 유형과 무수한 범주의 모노크롬이 과거에 존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다시 모노크롬을 창작의 화두로 삼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작가’ 박상우의 전언은 명확하다. 모노크롬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고 오히려 지금부터라는 것이다. 그 새로운 시작은 모노크롬 사진에서부터다. 그 논리를 간략히 더듬어보자.
모노크롬을 추구했던 화가들의 생각과 미술사의 논리에는 편차와 다양성이 있다. 단색을 절대성의 표현으로 받아들인 경우, 추상의 궁극적 도달점으로 밀고나간 경우, 시각의 전제 조건으로 탐구한 경우, 기존 회화에 대한 극단적 부정의 형태로 제시한 경우 등 그 목적과 지향은 제각각이다.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시원은 고전적인 재현 회화와의 결별에서 찾을 수 있다. 실재를 재현하고자 하는 충동이 꺾인 지점에서 회화는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혹은 그 결과로서 출현했던 아방가르드 미술의 다양한 양상들 속에 모노크롬 회화가 있다. 핵심은 화폭에서 오브제(사물)를 추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브제 없이 도대체 어떻게 화폭을 채울 것인가?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화가들은 번민에 번민을 거듭했다. 말레비치는 구체적인 사물의 재현을 단념하고 절대성(신, 신성)을 재현 대상으로 상정하면서 궁극의 회화, 말하자면 ‘최후의’ 회화를 꿈꾼다. 그 과정에서 생산된 기하학적 형태와 추상은 현대판 성상파괴주의(Iconoclasm)로 해석되기도 한다. 한편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사물(공간) 대신 ‘평면’을 선택하지만 결국 미니멀리즘의 오브제 전략에 밀려 ‘실패한’ 모노크롬으로 남는다. 모노크롬의 ‘과격한’ 신봉자들은 컬러를 버리고 무채색에 탐닉하나 결과는 마찬가지다. 단일한 블랙 속에도 형태와 명암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빈 캔버스를 연상시키는 화이트 모노크롬으로도 형태의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오히려 화가들은 적극적으로 ‘은밀하게’ 형태를 심어놓는다. 미니멀리즘을 통해 얻은 교훈이다.
모노크롬 화가들의 고민을 과장하여 예시해 보자.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은 그림, 그저 물감만 발라놓은 그림이 회화인가? 나아가 물감마저도 펼쳐놓지 않은 텅 빈 캔버스도 회화일 수 있는가? 수많은 종류의 모노크롬 회화가 전자의 질문에 이미 답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뒤샹의 파격은 BHV에서 구입해 온 텅 빈 캔버스도 ‘비록’ 회화는 아닐지언정 ‘예술작품’일 수 있다고 강변한다. 이런 종류의 Q&A는 이제 유치하고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 덕분에 모노크롬의 논리는 더욱 탄탄해졌다. 즉 오브제가 없더라도 단색으로 풍부한 감각 대상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상은 단일해 보이는 색 속에도 무수한 색의 스펙트럼이 있으며, 오히려 이 ‘미세한’ 차이가 모노크롬의 풍요를 만들어낸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블루가 있는가? 따라서 모노크롬이 멀티크롬보다 단조롭다고 할 수 없다. 물론 냉정하게 말하자면 모노는 멀티보다 무미건조하다. 그러나 이 ‘무미’가 지닌 심미적 차원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무미의 차원은 취미판단의 주관성이라는 칸트 미학의 딜레마를 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품고 있다. 좋은 취향(bon goût, good taste)과 나쁜 취향(mauvais goût, bad taste)의 ‘주관적’ 구분이 어떻게 ‘객관성’을 획득할 것인가. 무미(sans goût, without taste)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겨둔다. 중국 회화에서도 무미는 최고의 경지로 간주됐다. 어떻게 눈을 현혹시키지 않고 아름다움을 표현할 것인지, 감정의 동요 없이 세속 취향에 흔들리지 않고 어떻게 감동을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성찰은 무미의 차원이 추구하는 가치와 맞닿아 있다. 단조로워 보이는 모노크롬은 그렇게 무미의 미학을 향한다.
이제 모노크롬 사진으로 돌아가 보자. 작가는 왜 굳이 사진으로 모노크롬의 세계를 펼쳐보이고자 했을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적합한 매체여서다. 말하자면 오브제 자체에 모노크롬의 세계가 있으며, 오브제를 ‘필연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사진의 특수성은 그 세계를 ‘발견’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회화는 오브제를 버림으로써 모노크롬을 실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진을 취한 작가는 반대로 오브제에 적극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모노크롬의 놀라운 우주를 발견했다. 게다가 그 ‘우주’는 심오한 ‘절대성’이나 복잡하고 난해한 논리의 세계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모노크롬의 우주는 일상 속에 널려있다. 사람들의 손 떼 묻은 휴대폰 액정화면이나 지폐의 표면, 비행기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이 모두 모노크롬의 광대한 우주에 속한다. 따라서 작가의 암시에 따르면 모노크롬은 오브제 자체다. 오브제의 표면은 모노크롬으로 덮여있다. 그런 점에서 오브제를 축출함으로써 모노크롬의 세계를 열고자 했던 화가들의 노력은 부질없다. 사용자들의 지문과 터치자국을 근접 촬영한 휴대폰 액정화면은 다양한 ‘블랙 페인팅’이 보여주는 붓 터치의 흔적과 다를 바 없다. 검정색 모노크롬 사진의 표면은 풍부한 형상으로 가득 차 있다.
휴대폰이나 동전, 지폐 등 일상의 오브제로부터 모노크롬을 찾아 나선 작가의 또 다른 의도가 있다. 모노크롬은 신성을 상징하는 종교의 세계나 논리로 무장한 철학의 세계, 단아한 형상으로 표현된 ‘고상한’ 예술 세계에만 한정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통속적인 세계, 미추가 뒤섞이고 선악이 넘나들며 고상한 가치가 평범한 가치에 자리를 물려주는 세속의 세계에 속한다. 휴대폰 액정 화면을 덮고 있는 ‘미세한’ 형상들은 사실 더럽고 지저분한 손 떼 자국의 산물이며,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온갖 세균으로 뒤덮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당히’ 다가가면 우아한 모노크롬의 세계가 보인다. 거기서 은하수를 보는 이도 있고, 블랙홀을 보는 이도 있으며 낭만적인 밤하늘을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무섭고 침울한 절망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것이 모노크롬이 지닌 풍요로운 시각적 특성이다. 이제 작가의 ‘통속적인’ 모노크롬은 물질의 세계로 향한다. 금과 은, 동전, 지폐가 그것이다. 통속적이면서 동시에 숭배의 대상인 이 물질들은 휴대폰 화면과 달리 ‘멀리서’ 보아야만 모노크롬으로 탄생한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우아한 모노크롬의 표면은 사라지고 형태의 디테일이 나타난다. 물질을 멀리 하라는 뜻일까? 어쨌든 작가의 모노크롬 사진은 결국 모노크롬이 ‘저 너머’ 초월적 세계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저 아래’ 세계에 존재하는 ‘평범한’ 가치와 맞닿아 있음을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의 모노크롬 사진은 기존의 모노크롬 회화에 대해 격한 비판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요컨대 작금의 모노크롬 회화는 초월과 숭고라는 이름으로 모노크롬의 세계를 한정시켜 버리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모노크롬을 세속의 세계로 ‘하강’시킴으로써 ‘축소된’ 모노크롬의 가능성을 회복하려 한다. 결국 통속적인 오브제를 끌어들여 ‘숭고한’ 회화를 질책하고 있는 셈이다. 그 질책의 목소리는 낮지만 묵직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노크롬은 ‘저 너머’의 세계를 향한 창문이 아니라 ‘바로 여기’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그리고 그 거울이 보여주는 세계는 작품이 보여주듯 역설적이게도 우아하고 아름답다.

불신과 맹신
양유연 Yooyun Yang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김홍기(미술평론가)
누군가는 우리가 불신이 팽배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우리가 맹신이 창궐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당신을 지그시 응시하는 저 사람이 벗인지 적인지 도무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당신에게 다가서는 여러 손들은 당신을 어루만지려는 것도 같고 당신을 낚아채려는 것도 같다. 각종 매체는 누구든 각광받는 스타가 되어 갈채를 받을 수 있다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사나운 눈초리를 희번덕거리는 온갖 감시 시스템은 누구든 범죄자가 되어 색출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당신을 비추는 저 불빛은 영광의 스포트라이트인지 추궁의 서치라이트인지 도저히 판단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기자니 그곳이 안온한 도피처인지 망각과 낙오의 심연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이 맹위를 떨치는 시대에 우리 모두는 쇼윈도에 전시된 상품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가 흠모와 매혹의 대상으로 격상할지 혐오와 공포의 대상으로 전락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길함과 흉함이 합의점을 찾지 못한 상태가 오늘날 당신이 처한 상태이다. 요컨대 이곳은 과잉과 결핍이 서로 화학적으로 뒤섞여 균형을 이루는 데 실패한, 단지 물리적으로 뒤엉켜 있을 뿐인 불확실성의 도가니다. 이것이 양유연이 바라본 세계의 모습이다.
이 극단적인 불확실성의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양유연은 기존의 작업과 다른 여러 형식상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먼저 그가 그리는 종이의 변화를 들 수 있다. 한동안 장지만을 고집하며 회화를 그려온 양유연은 최근 몇몇 작품을 순지에 그리기 시작했다. 두껍고 질긴 장지보다 얇고 연한 순지가 때때로 그의 착상을 실현하기에 더 유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장지가 그 위에 옅은 채도의 물감을 수차례 쌓아올려 두터운 화면의 질감을 만들어내기에 적합한 종이라면, 장지보다 더 흡수력이 강한 순지는 그 밑에 물감을 끌어들이기에 더 적합한 종이이다. 순지에 내려앉은 물감은 종이의 표면을 가로질러 쉽사리 그 이면에까지 다다른다. 그리하여 순지에 가닿는 붓질은 종이의 표면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까지 지나간 흔적을 남긴다. 순지의 이런 특징을 염두에 둔 양유연은 종이의 표면에 붓질을 하면서 그 이면의 효과를 기대한다. 또는 종이의 이면에 붓질을 하면서 그 표면의 효과를 기대한다고 말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표면과 이면의 구별이란 본질적이기는커녕 우연적이고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종이의 한쪽 면을 표면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다른 한쪽 면은 예외 없이 이면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양유연이 순지의 표면과 이면을 모두 작업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표면과 이면의 작위적인 이분법이 불신과 맹신의 극단적인 이분법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표면과 이면의 구분이 순지를 뒤집는 순간 금세 뒤바뀌어 버리듯이, 맹신은 사소한 계기로 그 마음이 돌아서면 순식간에 혹독한 불신으로 바뀌어 버린다. 극단의 감정은 마치 종이를 뒤집듯 쉽사리 뒤바뀌는 것이다. 불신과 맹신이든, 매혹과 혐오이든, 낙관과 비관이든 상관없이, 어떤 감정의 과잉과 결핍은 그것이 모두 맹목적인 극단의 상태에 다다르면 서로 희한하게 닮게 된다. 지독한 어둠만큼이나 과도한 빛도 눈을 멀게 만드는 것이다. 양유연이 순지에 그린 회화에서도 역시 표면과 이면이 매우 닮아 있다. 다만 좌우가 반전되어 있고 붓질이 직접 닿은 면의 이미지가 다른 면의 그것보다 더 촘촘하고 뚜렷할 뿐이다. 두 이미지는 표면과 이면이라는 엄격한 대립관계를 형성하는 듯하지만 그 내용은 실상 매우 유사한 것이다. 그중 어느 면을 표면으로 삼느냐에 따라 다른 면은 과잉된 또는 결핍된 이면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 과잉과 결핍의 양자택일적 기로 앞에서 우리는 성마른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양유연은 이런 불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순지를 사용한 작품을 전시하는 형식에서도 변화를 꾀한다. 회화를 전시하는 전통적인 방식, 즉 회화를 벽에 밀착시켜 감상에 적당한 높이에 걸어 두는 방식에서 벗어나 전시장의 허공에 매달아 양면을 모두 노출시키는 방식을 시도한 것이다. 더불어 밝은 조명을 전시장 한편에 설치하여 이렇게 매달린 회화의 한쪽 면을 비춘다. 회화를 마치 조명 앞에 놓인 스크린처럼 설치한 것이다. 이렇듯 조명과 회화와 관객 사이의 복합적인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양유연은 원근법의 환영적인 삼차원이 아니라 전시공간이라는 실재적인 삼차원을 회화와 결합시킨다. 즉 관객이 적당한 위치에 서서 정면을 관조하는 회화가 아니라 실재로 공간을 이동하면서 모든 측면을 체험하는 회화를 연출한 것이다. 또한 이렇게 제시된 양유연의 스크린-회화는 얇고 연한 순지를 사용한 까닭에 불투명과 투명 사이의 어딘가에 놓인 반투명의 속성을 띠게 된다. 빛의 반사와 투과가 뒤섞인 독특한 효과를 자아내는 것이다. 반투명의 회화는 표면과 이면의 불확실성을 배가시킨다. 조명의 이편과 저편 중 어느 곳에서 보이는 화면이 회화의 표면인가? 우리는 어느 곳에서 이 회화를 감상해야 하는가? 어느 면을 불신해야 하며 어느 면을 맹신해야 하는가? 이 정답 없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하릴없이 작품의 주위를 맴돌며 성마른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불확실성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오늘날 끊임없이 부정되고 소거되는 경험이다. 과열된 경쟁과 가속화된 시간으로 점철된 극단의 자본주의 사회는 신속하고 확실한 판단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무엇을 맹신할지 불신할지, 누구를 벗으로 여길지 적으로 여길지 순식간에 결정해야 하는 시대이다. 판단의 진정성은 나 몰라라 하는 시대이다. 일단은 불확실성 자체를 어떻게든 몰아내야 한다고 다그치는 시대이다. 불확실성을 그 자체로 응시하고 사유하는 것은 소외와 낙오로 전락하는 지름길이라고 을러대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이 광란의 질주를 되돌아볼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탈락한 불확실성의 세계를 다시금 소환해내는 것이 절실한 시대이다.
양유연의 지난 작업들에서 그가 소환해내던 것은 주로 특정한 대상의 불확실성이었다. 예컨대 위안과 위협을 동시에 가하는 듯한 보름달의 모습, 불확실한 의미를 띤 얼굴이나 손 등 신체의 부분을 클로즈업한 모습, 빛과 어둠 속에서 각기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공장의 굴뚝 등이 그러한 대상들이었다. 최근의 작업에 등장하는 마네킹의 낯선 모습도 역시 불확실성을 띤 특정한 대상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그의 회화의 배경은 대개 단일한 색조를 띤 단일한 방향의 붓질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았고 클로즈업된 신체의 부분이 등장할 때는 배경 자체가 거의 사라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물론 배경의 색조가 회화의 정서를 형성하는 데 어느 정도 일조하는 바가 있었겠지만, 대상에 들인 관심에 비해 배경의 회화적 역할이 상대적으로 미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몇몇 회화에서 그가 배경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면 기존의 일관된 붓질과 달리 다양한 형태의 붓질이 시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뭉개진 붓질이나 다양한 방향의 붓질이 배경을 처리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배경이 대상 못지않게 고유한 회화적 존재감을 지니게 된 것이다. 화면에 묘사된 손의 흉터, 달의 무수한 분화구, 낡은 건물의 벗겨진 외벽만큼이나 배경의 공간도 자기만의 ‘살갗’을 지니게 된 것이다. 심지어 가장 최근에는 특정한 대상 없이 빛과 어둠만이 자리한 텅 빈 공간의 질감을 표현한 회화들도 시도되고 있다. 아마도 이런 변화는 양유연이 소환해내는 불확실성이 단지 특정한 대상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공간과 환경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요컨대 불신과 맹신, 벗과 적, 빛과 어둠, 서치라이트와 스포트라이트, 매혹과 혐오 등 양유연의 회화를 가로지르는 이분법적 대상들은 외관상으로는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어떤 공통점을 지닌다. 그것은 그 양편이 모두 극단의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 불신과 맹신은 모두 사태의 진상으로부터 등을 돌려 버리는 태도이며, 벗과 적의 이분법은 결국 무조건적인 배타성으로 귀결될 뿐이고, 눈부신 빛과 냉정한 어둠은 모두 눈앞의 현상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림막이다. 하나의 극단은 언제나 또 다른 극단과 직접적으로 통하는 법이어서 맹신은 쉽사리 불신으로 돌변하며 벗이 적이 되어 버리는 것도 한순간의 일이다. 갈채와 매도만이 허락된 세계에서 모두가 끊임없이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극단적 이분법이 야기하는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상품자본주의의 논리는 역설적이게도 매 순간 더욱 더 민첩하고 확실한 판단을 강요한다. 이처럼 가속화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심지어 불확실성을 불확실성으로 받아들일 시간적 여유마저 박탈당한다. 이로 인한 극도의 피로감 속에서 어느새 우리의 모습은 영혼을 잃어버린 허수아비의 그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인간 같은 마네킹과 마네킹 같은 인간이 한데 뒤엉켜 버리게 되는 것이다. 양유연의 회화는 이 극단의 아수라장을, 불확실성의 폐허를 집요하게 형상화한다. 강요된 판단을 애써 중지시키고 피로사회의 불확실성을 그 자체로 응시하고 사유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황폐한 영혼을 일깨우는 질문을 던지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낯선 얼굴
강경구 김나리 안창홍
아이콘적 효과를 지닌 낯선 얼굴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오늘날 예술의 의무는 특이하고 가치 있는 것, 흥미로운 무언가를 만들거나 행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오래 전에 실러는 예술가를 “낯선 구조물”을 만드는 이라고 정의 한 바 있다. 이미 존재하거나 익숙한 것이 아닌 것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대 이후 삶의 풍경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온갖 물건들로 뒤덮이게 되고, 이는 일상을 온통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으로 바꿔놓았으며 자연스레 사람들의 의식과 감각도 변화시켜놓았다. 페티시즘과 오브제 미술은 이런 맥락에서 출현한다. 오늘날도 여전히 익숙한, 익숙하지 않은 재료와 방법론으로 작가들은 “낯선 구조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안기고 낯선 감각을 자아내며 기존 개념어로 규정된 사물과 세계를 죄 씻어내려 한다. 흔히 말하듯 예술이란 상식적인 삶을 가로지르는 또 다른 형식으로서의 삶을 사는 방식이기에, 또한 자기식의 인식지도 그리기를 통해서 세계를 재편하는 일에 복무 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작가의 몸과 감각으로 다시 만들어진 미술작품은, 그 안에 담긴 사물과 세계에 대한 해석과 재현은 이미 존재했었던, 존재하는 것과는 다르다. 실용적 차원의 물건과는 다른 차원에 놓인 낯선 구조물은 매 순간 특정하게, 우리의 감각이 흐르는 신체에 우리의 느낌이 만들어내는 기호를 그리는 것이다. 그러니 미술이란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압도하고 직관에 대해 초과를 일으키는 모종의 현상이 된다. 따라서 좋은 그림은 개념적 대상의 대상성을 넘어서 순수한 현상의 현상성을 드러내며 나아가 보이는 것 안에 내포된 보이지 않는 것의 효과, 즉 시선의 역설을 은밀히 간직하고 있다. 미술작품의 현상성이란 우리의 감각적이고 지각적인 시선 안에서의 보여 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보여 지는 것이 나의 시선 아래 완전히 파악되지는 못한다. 아니 결코 파악될 수도 없다. 그러니 미술은 가시성의 영역 너머의 것을 지시하는 일에 관여된다.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의 길을 순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작품은 가시성에서 미끄러져 비가시성으로의 길을 설핏 열어젖히거나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불현 듯 떠올려주는 것들이다. 시선의 역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강경구, 김나리, 안창홍은 동양화, 조각, 서양화 장르에 속한 작가들이지만 사실 그런 장르 구분은 무의미해 보인다. 강경구와 안창홍의 회화작업과 김나리의 입체작업은 매체의 차이에 불과하다. 이들은 각기 익숙한 재료, 자신들이 잘 다루는 무기를 통해 무엇인가를 재현하고 만들어낸다. 약간은 낯선 구조물을 만들어낸다. 외형적인 공유성은 바로 인간의 얼굴(얼굴과 함께 연결된 몸) 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각기 자신의 감각적인 형상을 통해 사람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종의 그 얼굴 형상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재현의 수단이기보다는 어떤 매개로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실제 존재하는 구체적인 인간하고는 무관하면서도 보편적인 인간존재와 자신의 내면과 현실적 삶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형상을 품고 있는 그런 얼굴이다. 이들이 그리고, 만든 얼굴은 비교적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그 너머로 유인하는 통로가 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얼굴이야말로…건물과 사물의 외관이 모방해내지 못하는 마주함의 예외적 사건이 근원적으로 일어나는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얼굴은 단지 외형적인 어떤 것의 다가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선으로 주어지는 것을 통해 일종의 (도움과 책임에 대한 부름 내지 호소로서의) 목소리로 나아가게 만들며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이행, 즉 윤리적 책임으로 까지 전환되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 미술과 연관시켜 생각해보자면 작가가 만든, 재현한 얼굴형상이 단지 단순한 모방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것은 타자의 얼굴을 대면시키고 떠올려주는 일이 된다. 타자의 목소리를 듣게 하는 일이고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나의 윤리적 대응의 자리를 살피는 것이다. 이른바 아이콘적 효과가 그것이다.
이들이 그리고 만든 것은 구체적인 인간의 형상이기도 하지만 특정인의 얼굴을 재현한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인간의 얼굴이자 기호로서의 인간 얼굴이다. 그것은 외관이나 대상에 얽매이는 얼굴이 아니다. 그렇다고 인지할 수 있는 영역들이 무화되어버린 추상적인 얼굴도 아니다. 닮음 꼴에 치중한 구상화도 아니고 관습적인 차원에서 구현된 미적인 얼굴은 더더욱 아니다. 이른바 바라보는 시선의 충만 아래 놓는 우상의 효과가 아니라 얼굴을 통해서 얼굴 너머로 우리의 시선을 전환시키는 그런 얼굴 아이콘이다. 그 얼굴은 구체적인 삶에서 나온 얼굴들이고 작가 자신들의 얼굴이자 숱한 타자의 얼굴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얼굴, 신체와 그의 삶을 떠올려주는 흔적이기도 하다. 삶이란 반응하고 응답하는 것이다. 이들은 얼굴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삶을 환기하고 발언하고 타자의 삶에 대해 환기시키고자 한다. 소통하고자 한다. 그 익명의 얼굴과 응대하고자 하며 그 소리에 반응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환기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이 얼굴은 출현한다. 따라서 이들의 얼굴 형상은 단지 얼굴의 모방, 재현이 아니라 그 무엇을 하는 얼굴들이다. 예술이라는 단어는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행해진 것, 만들어진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강경구의 흑백 그림 안에서 음각의 선들은 실루엣을 남긴다. 바탕 면을 긁어서, 비워서 만든 선이 벌거벗은 남자의 전신상과 여자상을 안겨주거나 사마귀의 형상을 남겨준다. 모필을 대신해 날카로운 도구가 표면의 물감 층을 벗겨내서 만든 유연한 선이 이미지/형상을 안긴다. 그 형상은 작가가 바라보고 이해하는 동시대 인간존재에 대한(자신을 포함 한) 풍자와 비유를 함축한 표정을 짓고 있다. 흑백의 단순하고 힘 있는 색상대비 아래 거침없이 흐르는 단호하고 결연한 선들은 유연하고 자유로운 감정을 산개하면서 지극히 편하고 자연스러운 그림을 만든다. 수묵화와 전각, 목판화와 모필 드로잉의 모든 형식과 매력이 두루 공존하는 그림이자 그로 인해 두드러지는 선의 맛이 결정적으로 돋보인다. 기본적으로 모필이 바탕이 되고 수묵화의 경험아래 탄탄하게 조율된 흑백의 구성은 그 안에 전각과 목판화에 대한 작가의 내공을 두루 탑재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같은 재료체험이나 방법론은 동양화의 한정된 틀에 대한 작가의 의식적인 확장 내지는 새로운 소통의 차원에 대한 모색과 연동되어 있다. 모필이나 칼을 넘어 근작에는 뾰족한 도구로 각인한 결정적인 선으로 거침없이, 자연스레 그려낸 얼굴/몸의 형상은 작가가 바라보는 현실과 인간에 대한 풍부한 담론의 서술에 기여한다. 모종의 아이콘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얼굴 형상이다.
김나리는 흙으로 인간의 얼굴, 그 정면상을 정직하게 빚었다.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은 오로지 얼굴 하나로 이 세계와 독대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고독하고 결연하다. 그 얼굴은 한 인간의 전부로 나앉아있다. 보는 이들은 이 얼굴을 차마 외면하기 어렵다. 자신의 얼굴이자 타인의 얼굴이고 망각될 수 없는 얼굴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지속해서 변형된다. 손바닥 안에 은거하거나 도깨비형상으로 변이되거나 불상과 겹치는가 하면 또 다른 존재와 혼거하고 있다. 다양한 변신이 이루어지고 혼성을 거듭한다. 구상적 형식에 초현실적인 전략이 교차하고 있다. 이 가변성은 작가가 얼굴에 부여하는 일종의 애도의 전략이다. 애도란 상실을 처리하고 슬픔을 견디며 메우는 일이다. 한편 현실에 대응하는 얼굴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면을 응시하는 얼굴은 특정한 시선의 전제가 아니라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현실, 시대라는 시각적 장을 응시하는 투사적 성격이 짙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얼굴 하나로 그는 자신의 시대, 현실, 삶을 견인하고자 한다. 눈을 떼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 얼굴형상을 보는 이들은 역시 저 단호하고 깊고 또렷한 얼굴에 자기 얼굴을 올려놓고 싶어지거나 저런 얼굴 하나로 다시 살고자 한다.
안창홍의 얼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작가의 전형적인 도상의 역할을 해왔다. 화려한 방법론을 통해 보여주는 그 얼굴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생성된 창조적인 얼굴이고 존재하지 않는 얼굴, 그러니 작가에 의해 새롭게 존재하는 얼굴형상이다. 그로테스크하고 무섭고 흉측해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은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의 재현이라는 그간 미술사에서 관습적으로 재현되어 온 그 모든 얼굴을 뒤덮는다. 또한 유사한 방법론과 기술적 측면 역시 거침없이 망실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화려한 솜씨가 두드러진다. 이처럼 그는 기존의 미적이고 상투적인 아름다움에 저항한다. 그것은 소재와 기법, 모두에 대한 의도적 일탈로 자행된다. 작가는 얼굴 너머의 얼굴, 그리지 못하는 얼굴, 숨기고 있는 얼굴, 혹은 자신이 보고 만 얼굴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억압되거나 가려졌던 것들을 죄다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니 그가 그려낸 얼굴은 일종의 복원된 얼굴들이고 환생한 얼굴에 해당한다. 누구의 얼굴이 아닌 역사와 현실 속에서 망각되거나 문화와 문명 아래 억압됐거나 혹은 제도와 권력, 이성과 내면에 의해 감추어졌던 그 모든 얼굴들을 호명하고 있다. 얼굴의 종류, 사연만큼이나 그 얼굴들을 그려내는 그의 기법, 방법론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다채로운 기법으로 등장하는 안창홍의 얼굴 형상은 이 속악한 현실로부터 발견한 인간 군상들의 초상이고 각자의 내면에 감춰둔 비밀스러운 얼굴이기도 하고 외면에 가려진 어둡고 눅눅하게 지워지고 불어터진, 그래서 차마 볼 수 없었던 저 안에 자리한 비가시적 얼굴들이다. 그 얼굴들이 홀연 가시적 상태로 출몰한 것이다.
늘상 예술가들은 시대의 불안정과 내면의 이야기를 재현하고 치유하고자 해왔다. 선사시대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은 어느 면에서 여전히 샤먼들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세 사람은 모두 얼굴 형상을 재현한다. 그 얼굴은 익숙한 얼굴의 재현과는 조금 다르다. 단지 도상에 머물지도 않는다. 형상은 보는 것에 달라붙은 쾌락이나 미적 즐거움을 동반하지 않고 더 나아간다. 이들은 얼굴을 빌어, 그 형상을 통해 인간에 대해, 현실과 시대에 대해, 개개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모종의 내밀한 의식들을 선보이고자 한다. 얼굴이란 형상, 그 아이콘적 효과를 지닌 얼굴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시대와 현실에 대한 나름의 의식(ritual)을 치르고 있다.

우아한 도시 Elegant Town
정경자 Kyungja Jeong
파편의 연대(連帶)
정현(미술비평, 인하대 교수)
“햇빛에 반짝이는 약간의 먼지, 파라솔의 물결무늬 위로 떨어지는 녹은 눈의 물방울, 당나귀 주둥이의 잎사귀, 이것들은 물질에 의한 비유로, 이것들은 사랑의 이유를 사물들의 근거의 커다란 부재와 필적하게 함으로서 사랑을 발명한다.”1)
1.
전시 <우아한 도시>는 경쟁적인 고도성장이 이뤄낸 수많은 동어반복적인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 장소들은 작가 개인의 경험이나 삶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적다. 정경자는 이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물, 광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도시의 표정을 발견하는 순간이라고 설명한다. 그녀가 찾아낸 표정들을 살펴보니 낯섦만큼이나 익숙함이 공존한다. 이러한 사진의 이중성은 장소의 모호함과 익숙한 피사체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의 정서를 지배하는 것은 맥락이나 상황보다는 시적 감응이다. 장소의 정체성이 지워진 채 우연히 발견된 이 사물/풍경은 비로소 사진에 의하여, 작가의 시선에 의하여 존재를 드러낸다. 시간도 장소도 분리된 사진 속 이미지는 익숙한 기억을 호출하기도 하고 반대로 익숙한 기대를 깨트리기도 한다. 작가에게 우연이란 단어는 사실 필연에 더 가깝게 이해된다. 도무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우연의 결과물들이 각기 다른 이미지들과 병렬로 접합되면서 사진은 여러 겹의 이야기로 발화(發話)한다. 일련의 사진들은 그저 무책임한 추억을 꺼내오는 것과 다르며, 그렇다고 구체적인 정황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자크 랑시에르는 사진 미학이 현실과의 유사성으로 예술이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 이론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그것은 유사성이 변경된 어떤 체제, 즉 말할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의 관계들이 이루는 어떤 체계의 체제이다.”2) 다시 말해서 매체를 막론하고 이미지란 시각과 언어에 의하여 구성되고, 어떤 사조나 유파가 두각을 나타내는 현상은 새로운 예술의 등장 덕분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는 정치적 상황에 의한 변화라는 것이다. 사진을 비롯한 이미지는 지식의 형태나 학술적 틀에 의해 해석되는 게 아니라 바로 예술가에 의하여 이미지의 다양한 가능성, 관계항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2.
근대로부터 세계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유형의 도시 산책자가 나타났다. 이미지와 언어, 문학과 미술, 사진과 미디어는 도시 산책자의 필수적 매체이다. 작가는 인공미로 채워진 도시를 산책한다. 발터벤야민은 도시의 인공미를 사랑했다. 앤디워홀은 엠파이어 빌딩을 실시간으로 촬영했고, 김수자는 보따리를 실은 트럭을 타고 굽은 길을 넘었다. 구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힘, 민중이 이끄는 세상은 기계와 인공미에 의해 가능할 것이라는 유토피아의 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상중은 세계화의 현장이 되어버린 도쿄를 크레올화(Creolization, 혼성화)되고 있다고 관찰했다. 유토피아는 단순히 천국이 아니다. 그곳은 여러 주체와 복합적인 이해관계가 뒤섞인 정치의 장이고 무엇보다 투기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렇듯 개발 정책에 의한 고도성장의 꿈은 한국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정서이다. 물론 이 꿈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는 또 다른 질문일 것이다. 더불어 모든 사람이 성장의 꿈에 물들어 있지도 않다. 현재는 바로 이 꿈 자체가 문제적일 터이니 말이다. 설령 젊은 세대가 윗세대의 꿈을 유산이라기보다는 짐으로, 아니면 이미 부패된 낡은 관념으로 치부한다 해도 그 누구도 쉽사리 부정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꿈은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점령하고 있다. 개발도시에서 신도시로, 신도시에서 혁신도시로, 디지털미디어시티에서 에코시티로. 이렇게 세워진 도시들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재개발은 대단지 공동주택 뿐만 아니라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도입하여 삶의 질, 소비를 위한 위대한 신전도 함께 개발되기 마련이다. 유토피아 실현의 기획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유토피아를 재현한 광고 이미지야말로 이미지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반복적이고 강박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시각적 재현의 경향이 스펙터클에서 삶의 현장과 일상으로 시점을 이동시켰다고 해서 그것이 보다 진보적인 예술적 태도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반대로 이미지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질문해보자.
랑시에르는 <이미지의 운명>에서 재현적 이미지에서 비재현적 이미지로의 이행을 추구한 모더니즘(러시아 아방가르드부터 추상표현주의에 이르는)미술이 이미지의 종언을 고하고 이를 애도하려는 기호학자들의 관성적 태도를 비판한다. 그는 이제는 기호학적으로 이미지의 쾌락이 유효한 시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특히 현대사진에 있어서 기호학의 영토를 벗어나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냉전시대의 역사적 잔해나 개발주의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세워진 기념비들을 찍거나(근대 이후의 표지석을 통한 역사의 재구성), 사물·인물·도시·자연을 모두 등가물로 전제하는 사진은 기표와 기의가 불일치하는 포스트모던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이미지는 기호학의 세계로 해석될 수 없고 오히려 미학적이고 담론적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현상을 종말의 징후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삶의 체제가 바뀌었다고 보아야 할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랑시에르는 위의 물음에 대하여 아마도 체제의 변화라 답할 것이다.
3.
정경자는 보는 이에게 사진의 순수성을 주장하지도 않고 기호학적 해석에 근거한 의미화에서도 벗어나 있다. 장소의 구체성과 대상의 정보가 불확실한 상태의 사진을 앞에 두고 우리는 기억·지식·경험 등을 활용하여 유사한 대상들과의 대입을 시도한다. 우리들은 그저 어디서 본 듯한 이미지, 짓다 만 건물의 유형, 초현실적인 풍경을 닮았다고 혹은 연상시킨다는 생각을 되뇔 수밖에 없다. 그녀는 복합적 이해관계와 이기심으로 세워진 유토피아의 클리셰 주변을 배회하면서 과장된 파사드와 멋 부린 그래픽으로 속내를 감춘 욕망의 기표에 가려진 대상/존재를 발견한다. 그것은 종마처럼 맹목적인 경주 상태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정경자가 우연히 발견한 사물/풍경은 가시적/비가시적 관계가 이룬 체계로 해석할 수 있을까? 이 순간적인 사진이 작가의 즉흥적인 심리 상태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비평적으로 찾아낼 수 있을까? 랑시에르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지는 무언의 말[하기]로서 사물의 한복판에 거주.” 한다고 말한다. 정경자의 사진들은 공통적으로 시간, 언어,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그녀는 보이는 세상을 절개한다. 인류의 진리나 삶의 비밀을 캐기 위한 해부학적 절개가 아니라 그녀가 볼 수 있는 시각적 한계를 유효한 세계로 한정시킨 후 평면으로 만든 세계의 이미지를 도려내는 방식에 가깝다. 이처럼 포착된 장면은 애초부터 거대한 맥락에 속하지 않은 것들로 이뤄졌다. 그것들은 화려하든 초라하든 역사를 갖지 않은 채 우발적인 기획이나 일시적인 방책으로 탄생한 것들이기에 역사 바깥에 존재한다. 작가는 탈역사라는 문화적 저항과 무관하게 자신의 방식으로 역사와 의미를 갖지 못 한 대상/풍경을 발췌한다. 짧지 않은 작가로서의 발자취도 대개 이 ‘발췌’를 통하여 시적 순간을 제시했다. 하지만 바로 이 ‘시적 순간’을 혼돈하지 말자. 왜냐하면 여기서의 시적 순간은 단순히 상투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표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발췌된, 혹은 절개된 이미지가 세계의 일부이면서 또한 사회적으로 가려진 표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4.
<우아한 도시>에 소개된 콜라주를 통한 이미저리는 관객에게 이미지들 간의 유사성과 차이를 찾으라고 유도하는 듯하다. 언뜻 보면 유사한 대상들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진 간의 유사성은 색, 질감, 형태와 같은 조형적 특성일 뿐, 피사체와의 공통분모는 희미하다. 모순적 상황은 곳곳에서 포착된다. 담장 위에 불쑥 솟아 있는 철골의 형태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뻗은 이름 모를 식물의 몸짓의 조합, 댄 플래빈(Dan Flavin)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형광등과 탁구 네트 뒤 주홍 탁구공이 놓인 사진의 조합은 자연과 인공, 예술과 일상을 비교한다. 그것은 작가의 판단이나 관객을 향한 요구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성공을 향해 질주한 끝자락에서 발견되는 우연의 산물이자 기획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완결될 수 없는 삶의 장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다시 새로운 인식의 체제로 되돌아가보자. 정경자의 사진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 사이를 맴돌고 있다. 개발과 욕망으로 기획된 도시들의 웅장한 광경은 적나라하게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명시한다. 그것들은 시각적으로 숨김없이 지시한다. 설사 구체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광경의 미학은 다수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을 항시적으로 제안한다. 구체적인 상품이나 내용은 감추면서도 그것은 매우 촘촘하게 말하고 있다.
정경자는 강력한 사회적 욕망의 목소리와 이미지 사이에서 말을 잃어버린 대상들, 틀림없이 존재하지만 지나치게 관습적이기에 사람들부터 소외된 인공물과 자연물과 마주한다. 그것은 바르트의 푼크툼(punctum)의 명시적 의미 “그건 그랬지 ça-à-été”를 체현 한다. 게다가 전시 <우아한 도시>는 관객들의 회상을 허락하는 정서적 공감에 머무르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기획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꿈틀대는 생명의 잠재력과 완벽하게 제어되지 않는 인공물의 저항을 보여준다. 영상 작업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발췌한 문장들이 임의로 사진들과 조합된다. 의미는 관객의 경험이나 취향에 따라 무한 생성될 것이다. 작가는 파편을 전체의 일부로 편입시키지 않고 오히려 파편들을 병렬하여 예측할 수 없는 의미들이 발생되도록 유도한다. 이 같은 문장과 이미지를 뒤섞은 작업은 아직 실험의 단계로 보이지만 비슷한 유형의 작가들(마사 로슬러, 소피 칼)과 다른 지평을 발견하기를 개인적으로 기대한다. 더불어 그녀의 “사진적 찰나”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고,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의 웅성거림에 더 가까이 다가가길 바란다.
1) 자크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현실문화, 2014, 83쪽
2) 같은 책, 28쪽

水 · 竹
최병관 Choi, Byungkwan
자연이 만든 우연적인 선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흔히 회화를 ‘일정한 평면에 눈속임(일루젼)을 불러일으키는 장치’ 혹은 ‘어떤 지지대나 장소 위에 각종 안료를 써서 형상을 표현한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결국 회화란 자신의 존재론적 조건인 평면위에 이미지를 불러내는 일이다. 이는 사진의 경우도 동일하다. 사진 역시 일정한 평면위에 이미지를 안착시키는 일에 해당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선험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존재에 부단히 밀착하는 일이다. 마치 사물의 피부에 투명한 미농지(트레이싱지)로 눌러 그린 것처럼 세계의 표면을 문지르는 행위가 사진이기도 하다. 그것 역시 일정한 평면 안에서, 주어진 사각형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니 사진 역시 회화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평면, 그리고 사각형의 프레임 자체가 사진의 내용을 규정짓는 핵심적인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최병관의 사진은 정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대나무와 물을 담았다. 수직의 대나무와 수평의 물은 사각형 프레임 안에 적막하게 응고되어 있다. 대나무의 수직선들은 화면의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서면서 일정한 간격을 만들어 분할하고 있다. 눈부시게 환한 밝은 바탕을 등지고 약간의 두께와 짙은 색을 지닌 대나무의 몸통은 매력적인 윤곽선은 만들면서 슬쩍 흔들린다. 역광으로 인해 흑백의 미묘한 톤들이 부서진다. 차이를 발생시키는, 동일하지 않은 선들이 납작한 사각형의 평면 안에 다양한 조형적 선, 공간을 만들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는 흑백의 톤 역시 마찬가지다) 그로인해 여백이 만들어지고 비어있는 틈이 벌어진다. 마치 수묵으로 그려진 대나무 그림을 닮았다. 얼핏봐서는 사진인지 묵죽화인지 헷갈린다. 대나무에 달린 댓잎들은 바람에 흩날리거나 미세한 움직임을 동반하면서 우연적인 흔적, 기미를 남긴다. 이는 예기치 않은, 의도하지 않은 사건이다. 고정된 대상을 포착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바람 등의 조건과 그로인한 대나무의 움직임이 만든 비의도적인 결과물이 사진이 되었다. 사진은 동일성의 법칙, 재현의 틀에 사로잡히지 못하고 지속해서 미끄러진다. 결코 반복할 수 없는 대나무의 재현이다.
한편 정사각형의 화면을 가득 채운, 물(수면)을 담은 사진은 화면과 수면이 등가의 관계를 이루며 확고한 수평을 보여준다. 따라서 깊이가 부재한 화면에는 그저 수면이 지닌 그 표면만이 가득하게 펼쳐져있다. 심도를 상실한 수면/표면은 밋밋하고 단일한 색조로 적셔져있다. 그러나 그 색채 역시 문자화할 수 없는 색, 언어의 체계 바깥으로 미끄러지는 색채이자 매번 변화를 거듭하는 색이다. 그러니 동일한, 고정된 표면은 존재할 수 없다. 더구나 잔잔한 수면이지만 미세한 움직임이 조심스레 발견된다. 얼핏봐서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화면 같은, 그저 단일한 색으로 적셔진 색면 추상같은 사진이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표면에는 약간씩 다른 색채와 기포와 원형의 선들이 퍼져나가고 있다. 작가는 오랜 시간 수면을 응시하다가 예기치 않은 움직임, 수면에 생겨난 예민한 상처 같은 것을 발견한다. 외· 내부의 충격으로 인해 수면의 적막과 부동의 상태가 깨져나가는 순간이 걸려들었다. 그러자 수면은 매번 다른 동심원을 만들며 매혹적인 선을 그려낸다. 만들어낸다. 그 선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 있다. 인간의 손으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오로지 자연만이 우연적이며 순간적으로 만들어낸 선들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거듭한다. 사진은 그 사라지는 순간을 고정시킨다. 이렇게 사진은 사라지는 순간의 덧없음을 애도하듯 절박하게 수면의 상태를 기록한다. 그것이 사진의 쓸모 있음을, 그 기록과 재현의 정당성을 은연중 부여한다.
작가가 선택한 대상은 고정된 사물, 자연이면서도 동시에 미세한 움직임에 부대끼는 것들이다. 시간과 바람이 대나무와 수면을 건드리고 있다. 대나무와 수면은 스스로 흔들리면서, 표면에 주름을 짓고 파문을 형성하면서 그에 반응한다. 모종의 상형문자로 자기의 상태를 기술한다. 결코 기록될 수 없고 해독되지 못하는 자연의 반응이 덧없이 반복된다. 작가는 그 선으로 이루어진 대나무와 수면의 반응을 촬영했다. 섬세하고 집요하게 관찰해야 그것들이 짓는 작은 동작과 변화를 포착할 수 있다. 얼핏 봐서는 간과하기 쉬운 것이지만 숨을 멈추고 차분하고 느리게 바라보고 오래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자연의 리듬에 자신의 호흡, 숨을 맞추어야 가능한 일이다. 자연과 나의 몸이 분리되어서는 어려운 일이다.
대나무와 물은 둘 다 모두 선조를 중시한, 유려한 드로잉의 세계를 연상시켜준다. 대나무를 찍은 사진은 동양의 서예나 사군자의 필획을 연상시키는 편이며 대나무 특히 흑백의 계조는 먹의 농담을 그대로 닮았다. 마치 동양의 서예를 연상시키듯 완급, 태세, 경중 등 운필의 구사를 이용하여 대상의 골격을 잡아내 그린 그림과도 같다. 매우 의도적이고 계산적인 화면구성이자 간결하고 운치가 있다. 이는 수면을 촬영한 사진도 동일하다 그의 사진은 엄격한 기하학적 특성 및 ‘미니멀’하다는 공유성을 거느린다.
또한 이 두 사진은 새벽의 연못과 낮의 대숲에서 포착한 순간의 장면이다. 강한 조명과 빛이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니라 부드러운 빛이 전체적으로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분위기다. 박스형 카메라의 모범인 하셀 브라드의 사각형 포맷에 담아둔 이 자연풍경은 무척 엄격하게 절제되어 있다. 대나무 사진은 대 숲 안에서 밖을 본 시선이고 물은 사선의 거리에서, 위에서 내려다 본 구도다. 따라서 대나무의 배경은 거의 흰 색에 가까운 환한 하늘이 되고 물은 수면 전체가 납작한 표면과 일체가 되고 있고 흐릿한 보라와 블루가 뒤섞인다. 대나무는 흑백사진이고 수면을 촬영한 사진은 컬러사진이다. 그런데 그 흑백과 컬러의 색감은 다소 ‘톤 다운’ 된 느낌이다. 중성적인 톤은 부드럽고 몽환적이다. 대상을 찍기보다는 대상을 파고드는, 애무하는 빛을 부드럽게 건져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최병관 사진은 빛이 대상을 어루만지고 적셔내면서 그 대상을 어떠한 성격으로 만들어 내는, 성형해내는 그 지점을 포착한다. 그로인해 우리가 늘상 보는 이 익숙한 대상인 대나무와 수면이 무척이나 색다른 존재로, 해맑은 얼굴로, 지상에 출현한 이래로 지금까지 그 얼마나 다채로웠을 순간을 죄다 머금으면서 동시에 마치 처음 다가오는 표정으로 그렇게 프레임 안에 자리하고 있다.
대나무와 물은 또한 엄청난 메타포를 지닌 소재이기도 하다. 대나무와 물은 동양예술, 특히 동양화에서는 보편적인 화목이었다. 유교적 이념에 따른 종교적 도상에 해당하는 이 두 소재는 자연을 포괄하는 은유적인 도상이자 군자의 덕목을 내재하는 상징이다. 따라서 대나무와 물을 그린다는 것은 특정 자연대상의 재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물이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가치를 내재화한다는 의미를 포괄한다. 군자를 꿈꾸는 선비가 당연히 지녀야 할 지조와 절개, 지혜 등이 바로 대나무와 물이 함축하고 있는 덕목이다. 그러니 대나무와 물은 단지 그림의 소재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소재로 대변되던 유교적 이념과 지배시스템, 선비문화는 망실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유전인자 속에는, 문화적 전통 속에는 사군자와 산수에 대한 희구와 그 덕목에 대한 친연성과 기호가 유지되고 있기는 하다. 최병관은 개인적으로 대나무와 물을 좋아하고 자연스레 자신의 취향과 기호에 따라 대나무와 물을 촬영해왔다고 한다. 애초에 그 덕목을 목적론적으로 내세우려는 시도가 아니라, 혹은 그런 소재에 깃든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강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호, 감각에 따른 것이라는 얘기다.
최근 강화의 한적한 농가로 옮긴 작가의 작업실 주변에는 작은 오죽과 아름드리 소나무가 가득했다. 그는 그늘에 앉아 그 나무들을 바라보며 즐겁고 편안해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에는 안분과 자족의 삶으로 자연과 함께 소박한 생을 보냈던 선인들의 삶의 감수성이 반영된 산수화와 사군자의 한 자락이 얼핏 스며들어있다는 느낌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