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하는 방법론》은 사진과 회화 매체의 의미와 가능성을 확인시켜주는 강홍구와 최진욱의 “방법론”에 대한 전시이다. 동년배의 두 작가는, 각각 사진에서 회화적인 화면을, 회화에서 사진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신의 매체와 방법론으로부터 탈주하여 독특한 시각이미지를 구현해낸다. 이러한 탈주하는 방법론은 사진과 회화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전복시키는 한편, 매체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홍구와 최진욱, 두 작가는 서로 닮은 듯 닮지 않았다. 동갑내기의 두 작가는 뛰어난 미술-감각을 지녔고, 성실하다. 이들은 이미지 대홍수 시대에서 잠식되지 않고, 눈을 밝혀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또한 작업 만큼이나마 솔직하고 통쾌한 글쓰기로 미술계에서 자주 회자되곤 한다. 반면 서로 상반되는 모습들도 있다. 우선 강홍구는 사진을 매체로, 최진욱은 회화를 매체로 작업을 진행해왔다. 게다가 작업을 출발하는 지점도 다소 차이가 있다. 강홍구는 일상에서 마주한 기이한 풍경들을 보여주기 위해 사진을 찍었고, 최진욱은 회화 매체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왔다.
이렇게 닮은 듯, 닮지 않은 강홍구와 최진욱의 전시를 준비하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먼저 미술은 취미/취향에 따르지만, 전시는 의도와 맥락이 작동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랜 시간의 내공으로 탄탄하게 쌓아 올려진 두 작가의 작업들을 오해하거나 곡해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강홍구와 최진욱이 화면에서 구사했던 “탈주하는 방법론”처럼, 이번 전시에서 이들에 대한 어떤 오해나 곡해의 지점들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작동되기를 기대해본다.
강홍구는 ‘사진’에서의 무거운 것들을 가볍고 재치 있는 것으로 변환시켜왔다. 가벼움과 재치는 필연 유머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는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병치하거나 중첩시켜 생경한 상황을 보여주곤 했다. 현실의 풍경이 아는 것과 보는 것, 그 사이에서 어긋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에 우리는 웃을 수 밖에 없다.
강홍구는 2010년부터 그간의 사진적 방법론(사진-이미지를 이어 붙이기, 합성하기, 연출하기)이 아닌 새로운 방법론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바로 흑백으로 프린트 한 사진-이미지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보았던 것과 사진으로 찍힌 것 사이의 차이, 기억의 불일치 등을 개인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이 방법론을 택했다고 말한다. 이는 <그 집>(2010)을 시작으로, <녹색 연구>(2012), <서울 산경>(2013)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강홍구가 사진을 대하는 태도는 기존의 사진에 대한 고정관념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듯 하다. 사진의 사실성과 객관성에 대한 믿음과는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사진의 허구성을 전복시켜서 실체를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홍구의 사진-이미지는 우리의 현실감각에 흠집을 내고 달아나 버린다. 그는 우리가 실제로 작동시킨다고 여기는 삶이 얼마나 초현실적인지를, 그리고 사진이 ‘통일된 시각으로 완결된 무엇’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모던한 환상에 불과한지를 말이다. 특히나 사진-이미지 위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서 사진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인지시키고, 사진에서의 새로운 감각의 가능성을 도모한다.
한편 최진욱은 자기반성적인 태도를 기반으로 ‘회화’를 연구하고 실험해왔다. 회화의 오랜 역사에서 가늠해볼 수 있듯이,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했고 때로는 놀라움을 주었다. 이는 화가가 부단히 회화를 전복시키며, 새로운 회화성을 찾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회화의 종말’이라는 선언에 따라서 회화는 갈 곳을 잃어버린 듯 했다. 그러나 여전히 회화는 우리 삶 가까이에서 지속되고 있다. 다만 과거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 같다. 최진욱은 ‘회화는 무엇인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시작으로, ‘회화를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가’라는 회화의 방법론을 모색해 온 진지한 작가다. 특별히 그는 자신이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범위를 설정하고, 그 범위에 따라 그림을 그려왔다.
그의 회화에서는 ‘보는 것’과 ‘그리는 것’, 양자의 긴장감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기에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사물과 실내공간을 ‘보는 것-그리는 것-그린 것을 보는 것’으로, 시선의 겹들을 쌓아 화면을 통일시켰다. 때때로 그림 한 켠에는 ‘그림을 그리며 생각하는 자신’을 그렸다. 아마도 그의 행동과 생각들이 실내공간에 한계를 느끼게 하고, 바깥으로 나오게 했을지 모른다. 최진욱의 풍경 회화는 사진을 기반으로 한다. 그는 사진을 보고 그릴 수 밖에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만, 이를 통해 회화에서 불가능하지만 사진으로써 가능한 것들(생생함, 다시점, 과학성)을 화면에서 구축해낸다. 스냅 사진을 이어 붙인 듯, 3개의 대형 캔버스로 구성된 <살아있다는 것>은 관자의 시선을 좌우로 옮기고, 또한 발걸음을 사선으로 나아가게 한다. 2008년부터 시작된 <웃음> 연작은 사람들이 웃으면서 점프하는 순간을 포착한 장면으로, 화면을 전체적으로 약동시킨다. 이렇듯 최진욱의 회화는 고정된 시선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시선’을 획득하는 동시에 현대적 회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오늘의 미술작업은 회화와 조각과 같은 전통적인 매체 이외에도 사진, 영상, 설치, 디지털 아트, 커뮤니티 아트 등 새로운 매체가 사용되고,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미술 내부 뿐만 아니라 외부의 상황들과 내용들로 인해 복잡다단해지고 있다. 이러한 미술작업들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시작될 수 있었을까.
실패하지 않는 그림: 드로잉展은 모든 미술작업에 있어 선행하고, 실제로 이를 작동시키는 ‘드로잉’에 주목하는 전시다. 드로잉은 ‘생각’을 시각화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반복적으로 그리는 과정을 통해 이상적인 형태와 구도의 화면을 가능케 한다. 그렇지만 그동안 드로잉은 짧은 시간동안 빠르게, 공들이지 않고 그려졌다거나 회화라는 완성된 작품을 위해 숨겨져야 하는 스케치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드로잉 작업 역시 그럴까?
이번 전시는 최근 회화장르에서 ‘드로잉적 요소’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부터 시작됐다. 드로잉의 방법론을 사용하지만, 회화적인 화면을 획득하고 회화적 감수성을 환기시키는 작업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관자들은 드로잉 작업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더이상 흘깃 바라보고 지나치지 않는다. 이렇듯 과거 특별한 의미를 부여 받지 못했던 드로잉 작업은 오늘날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회화만큼의 시각성을 구현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드로잉은 회화라는 최종목적지를 향한 과도기가 아니다. 또한 미완의 상태에 따르는 막연함이나 답답함이라는 감정으로부터도 벗어나게 된다. 이제는 회화와 드로잉을 구별 짓는 일은 어렵고, 혹은 그와 같은 일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드로잉 작업은 실패하지 않는 그림이 된다.
실패하지 않는 그림: 드로잉展은 강성은, 성민화, 이선경, 허윤희, 네 명의 여성작가가 참여한다. 이들은 각각 연필, 잉크, 콘테, 목탄이라는 드로잉적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만을 공유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경험과 참조에 따라 사적인 서사구조를 형성하고, 흥미로운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를 통해 드로잉이 미술작업의 시작점에 위치한다는 사실과 현대미술에서의 드로잉 작업이 지닌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강성은의 ‘펜슬 클래식’은 2011년부터 드로잉 매체-연필-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부터 시작됐다. 특히 작가는 “밤”이라는 시공간에서 마주한 풍경을 성실하게 그려나간다. 켜켜이 쌓인 검은 연필 선은 밤 풍경에서 체험하는 시각적 깊이를 실현한다. 보통 빛이 사라지는 밤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상 눈의 감각이 가장 밝아지고 곤두서는 순간이다. 작가는 밤 풍경이 내재하고 있는 어두움과 찬란함이라는 이중적 시각을 검은 연필 선 그 자체와 그것들이 반사되는 순간으로 구현해낸다.
성민화는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에서 마주하게 되는 낯선 누군가의 집과 담벼락을 잉크로 세밀하게 그린다. 얇은 잉크 선의 ‘집’의 풍경들은 유희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시각 경험을 하게 해준다. 건축적 조형 감각과 건축물에 켜켜이 쌓인 주름들과 흔적들을 투명하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보이는 것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던 것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보이는 것은 무엇이었고, 보이지 않았던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섬세하고 성실한 관찰을 해야 할 것이다.
이선경은 거울을 통해 바라본 자신의 익숙하지만 낯설기만 한 얼굴을 작업의 주요한 모티프로 삼고, 색연필 혹은 콘테로 그려나간다. 여성의 옆 얼굴과 의도적으로 변형된 신체가 함께 그려지는데, 이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면서 부정하는 이중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근작은 가벼운 재료인 색연필과 콘테 사용에 깊이감이 더해지고 있다. 또한 특정 오브제나 동물들이 함께 나타난다. 이는 신체를 은폐하는 방법으로 충족되지 않았던 내면에 잠재된 불안과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으로 보여진다.
허윤희는 목탄으로 자신의 삶에서 마주하는 사물들을 다소 투박하면서도 힘을 주어 그려나간다. 특히 <나무> 작업은 목탄으로 그린 후에 이를 지워내 자국을 남기고, 다시 그 위에 그림을 그려나간다. 이렇게 쌓여진 ‘층(레이어)’은 흔적을 남길 뿐 아니라 회화적 화면의 깊이감을 형성한다. 한편 이는 삶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삶에서 마주하는 해답 없는 질문들에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성실하게 사유의 흔적을 좇는다.
수 년 동안 ‘갤러리 룩스 신진작가 공모’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사진공모전이 사정상 휴지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 갤러리 룩스 공간이 옥인동으로 이전하면서 그동안 공모전을 통해 선별된 작가 중 10 명을 모아 《Resight/Remind》을 마련하게 되었다. 김정회, 김태동, 박정표, 박찬민, 서영철, 성정원, 양호상, 원범식, 정경자, 조준용이 그들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심사에 참여하면서 젊은 사진작가들의 작업을 일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고 이를 통해 다양한 작가, 작품에 대한 정보 그리고 동시대 사진의 양상 등을 체험할 수 있었다. 공모에 선정된 작가들은 갤러리 룩스가 마련한 마련해준 초대전을 통해 자신들의 작업을 선보이는 소중한 기회를 마련하였고, 이를 통해 향후 보다 진전된 작업세계를 도모할 용기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갤러리의 역할과 소명은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하고 이들의 작업발표의 공간을 마련해줌과 동시에 작가들이 지속적으로 작업을 해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며 미술시장에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의 수많은 갤러리들이 그 같은 본래의 역할을 하고 있느냐 하는 점은 무척 회의적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동안 보여준 갤러리 룩스의 신진작가 공모전과 개인전 개최 등은 한국 사진계에 무척이나 소중한 기회였다고 본다. 갤러리 룩스가 이제 새로운 공간으로 이전하였고 그에 따라 그동안 해왔던 공모전을 보완하면서 새롭게 출발할 것으로 기대한다.
오늘날 젊은 작가들은 이전에 비해 전시의 기회가 풍부해졌고 그만큼 작품을 발표할 공간 및 다양한 지원제도를 비교적 풍요롭게 향유하고 있다. 그간 갤러리 룩스가 마련한 신진작가 공모전은 작가 지원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사진에 한정되긴 했지만 사진의 확장된 여러 경향들도 엿볼 수 있었다. 오늘날 장르 개념은 사실 무의미해진 편이다. 그러나 주어진 매체를 선택했다면 다른 매체와 구별되는 독자한 성질이나 특성을 자기 작업의 도구로 이용하고, 언어화 하는 나름의 필연성이나 당위성 같은 것은 불가피하게 요구되어 보인다. 그러니까 사진작업을 한다는 것은 매체와 내용 간의 긴장관계 내지는 그 둘의 절실한 접촉지대를 문제의식으로 끌어안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사진가들의 작업은 저마다 다른 개념적 시선과 함께 그것을 드러내는 기법의 편차를 통해 결국 자신이 대면하는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한편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사시적’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동안의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작가들은 사진에 대한 해석의 스펙트럼이 넓고 개별 사진들이 지니는 의미의 진폭도 큰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소박하지만 자신의 삶속에서 관찰된 세계를 질문하고 이를 표현하는 매체로 사진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동시에 사진이 어떠한 매체가 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작업들이 많았다. 사진은 분명 보는 행위로부터 출발해 그것이 남긴, 결국 보고만 것이 관자의 망막과 가슴에 상처 같고 여운 같은 심연을 파는 일이다. 그 구멍의 깊이가 아득한 사진이 좋은 사진일 것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10 명의 작가들은 일정한 시간의 경과 속에서 이전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모색을 도모하고 있다. 《Resight/Remind》는 그 흔적, 궤적을 엿보는 소중한 자리가 될 것이다. 그동안 이들의 작업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김정회의 <Light In The Night> 연작은 프레임 하단에 바싹 걸쳐진 건물의 외곽선과 그 사이로 번져 나오는 빛으로 이루어진 도시의 밤 풍경이었다. 무엇보다도 도회적 감수성을 대변하는 색채감각이 돋보였다. 근작 <Transmission Error> 연작은 도시의 풍경이 얼핏 드러나지만 실은 기계적 오류로 인해 지워진, 망친 부분이 표면을 덮고 있다. 규칙적인 선들이 표면을 잠식하는 데서 사진과 드로잉이 겹쳐지는 듯 하다. 작가는 사진의 재현적 기능을 의도적으로 폐기하고 그 부분을 활용한다. 그에 따라 사진은 실제 대상과 전송오류로 인하여 상실된 부분이 공존한다. 실제 이미지와 오류로 변형된 이미지가 서로 공존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재창조 되는, 개념적인 사진이다.
김태동의 <Day Break> 연작은 새벽에 홀로 도시를 부유하는 사람들을 촬영한다. 작가는 낯선 이들의 차가운 시선, 도시의 깊은 밤이 뿜어내는 스산함으로 인해 번져나는 묘한 긴장감을 건져 올리고자 했다. 그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욕망의 공간을 부유하는 사람들과 도시의 이면을 새롭게 보여줄 수 있게 되기’와‘도시의 끝자락에서 중심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으로 읽혀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결국 그것은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의 투영에 가깝다.
박정표의 <See, Sea> 연작은 바다를 마주하고 바라본 경험을 사진이미지를 통해 시각화한 작업이다. 바다를 바라본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사라지고 출몰하는, 고정된 상을 지니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채로운 표면을 거느린 거대한 질료 덩어리다. 작가는 그 표면에 깃든 다양한 시간, 가변적인 것에 매료되어 이를 다시 보여준다. 그것은 바다에 대한 개인적인 지각체험의 가시화다.
박찬민은 화면 가득 건축물의 외관을 보여 준다. 다양한 형태의 건축물 혹은 구조물의 단순화 혹은 배경의 삭제를 통해 본래의 형식적 측면을 부각하고 평면성을 강조한다. 사실 그 건축물은 영화촬영을 위해 만든 가상의 공간들이다. 사진이 지닌 재현의 기능, 진실과 기록 등을 문제 삼는 한편 허구와 가상이 실재를 압도하는 오늘날 현실에 대한 풍자로도 읽힌다.
서영철은 흑백사진으로 도시의 일상 풍경을 잡아내고 있다. 일정한 거리 속에서 엿보이는 도시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은 적조하고 고독해 보인다. 회색빛으로 가득한 도시공간에 놓여진 현대인들의 실존적인 상황에 주목하는 이 사진은 동시에 흑백사진이 지닌 구성과 톤의 조율이 자아내는 힘을 보여준다.
성정원의 작업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일상에 대한 해석의 언어로 사진을 구사해왔다. 특히 오늘날 소비사회에서 대량생산, 대량 소비되는 소비의 메커니즘을 질문해왔으며 타인과의 관계, 소통 등을 다루었다. 더불어 공간에 설치되는 연출을 통해 관자와의 소통을 도모하고 사진과 문자, 시각과 청각 등을 동원해 통감각적인 소통을 꾀한 작가다. 근작은 압착 고무와 바인딩 테이프를 유리창에 설치하거니 영상과 탄성줄(고무줄)을 이용한 설치 작업이다. 이 작업 역시 이전과 유사한 맥락에서 ‘두 지점을 연결하는 줄의 떨림을 통해 관계 속에서의 낯섦, 떨림, 그리고 관계 지속에 대한 의지와 지탱을 표현’하고자 한다.
양호상의 <Stereogram> 연작은 강렬하고 어른거리는 색채 속에 묻힌 옷 사진이다. 특정한 기호와 디자인을 보여주는 옷은 동일한 색채의 배경 속으로 스며들어 은닉되다가 문득 걸려든다. 사진의 평면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옷이라는 오브제와 그 배경의 구분자체를 무화시키는 한편 새삼 옷감의 프린팅과 패턴, 색채를 통해 특정 시간대의 역사와 기억을 은연중 건드린 사진이다. 명료한 정보를 제공하고 특정 형태를 기록하는 사진을 무력화시키는 옵아트적인 장치도 흥미롭다. 근작에서는 특히 사진의 재현과 디지털 복제를 통해 현대사회의 대량생산품인 오브제와 컴퓨터의 픽셀이미지로 표현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원범식의 사진은 건축물을 연결한 기이한 건축풍경사진이다. 이질적인 건축물의 외관을 연결해서 만든 이상한 풍경이자 동시에 무척 회화적인 요소도 가득했다. 그것은 거대하고 새로운 조각이기도 했다. 이 건축조각 사진은 대도시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ia의 콜라주에 해당한다. 그것은 인간의 환상, 욕망이 잘 구현된 아케이드이자 여러 정치, 역사, 사회적 환영을 표상하는 도시의 파편들을 수집, 봉합해 만든 거대한 조형물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루어진 건축사진은 작가가 수집한 건축양식의 총체이자 동시에 그것의 분열증적 집합에 따른 기이한 욕망의 착종과 어질한 대도시의 환영을 동시에 안겨준다.
정경자는 익숙한 존재, 대상을 보는 관점에 구멍을 낸다. 본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자 동시에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다시 보기를 감행하는 의식이다. 작가들은 후자를 따르는 이들이다. 작가는 자신의 감각을 자극하여 눈길을 끈 것들을 선택해서 촬영했다. 비근한 일상의 소재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앎과 미지의 것 사이에서 놀이한다. 세계와 사물은 그렇게 나를 둘러싸고 있다. 이미지들은 치유 불가능한 고독과 우울함을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삶은 언제나 그렇듯 계속된다.
조준용은 그동안 도시 주변에 자리한 열병합발전소를 찍었다. 도시라는 거대한 유기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발전소의 굴뚝, 건물의 일부분을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의 심장처럼 찍고자 했다는 작가의 의도가 날카로운 프레임에 의해 감각적으로 건져 올려진 사진이다. 근작 <Flaneur On Moving Truck>은 런던의 관광지에서 살아 있는 동상처럼 연기를 하는 거리 공연자들을 촬영했다. 그들의 이미지를 프로젝터를 이용해서 달리는 상업용 트럭의 화물칸에 영사시킨다. 이 과정 속에서 달리는 상업용 트럭은 거리 공연자들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캔버스 혹은 스크린이 되며 동시에 그 거리 공연자들의 이미지는 그 시-공간 속에 머무르게 된다. 작가는 그 같은 작업방식을 통해 서로 다른 시간성을 따르는 두 대상이 서로 상호작용하고 교차하며 만들어 내는 다채로운 시-공간적 리듬의 순간을 포착하고자 했다.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를 다루는 학문이다. 예술 또한 그렇다.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정답이 없는 삶과 인간이 출현시키는 그 무수한 현상의 의미를 공들여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것은 그토록 애매한 인간 혹은 인간의 가늠하기 어려운 애매함을 다룬다는 말로서 인간 존재의 다양함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의 다양한 측면은 그 자체로 의미를 발생시키고, 그 의미들이 해석을 열며, 이 해석들이 텍스트를 풍부하고 깊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고들 한다. 그러나 오늘날 주어진 제도와 삶의 틀이 요구하는 인간형은 애매성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무한경쟁과 자본이 우선되는 사회에서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일로 치부된다. 특히나 특정한 가치관과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거나 주입하는 한편 유사한 인간형을 요구하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곳에서 예술/미술을 한다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애매함, 모호함은 삶의 본질이자 인간의 본질이며 나아가 세상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은 답이 없으며, 끝까지 답이 없는 세계에서 살다 죽는다.” 예술은 그런 인간의 자리를 찾아 나선다.
우리는 자라면서, 교육을 받으며 세계와 삶에 대해 배운다. 기존의 가치관에 의해 물든 사유의 편린을 수용한다. 나 스스로 보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와 현실이 인식하고 있는 틀을 반성 없이 배운다. 그러니 우리는 실체와 본질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 보다는 이미 갖고 있던 관념이나 이미지를 현실에 덮어씌우려 한다. 그래서 정보와 지식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단순한 이미지에 갇히기 쉽다. 반면 좋은 작가들은 비록 불완전 하더라도 자기 눈으로 세계를 보고 그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스스로 보고 느낀 것을 그리고자 한다. 여기서 그는 비로소 주체가 된다. 작가란 이처럼 스스로 보는 이들이다. 사물이나 세계에 부여된 관념이나 상식을 따르는 이들이 아니라 그것을 물리친 자리에서, 여백 같고 공(空)한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다. 사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낯설고 의아하고 생경한 타자들이다. 인간은 그 타자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최소한 자신과 관계 맺는 타자에 대한 포용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작가란 존재들은 타자에 대해그러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다. 그것은 특정 장소, 특정 사물을 보고 있는 순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과 존재에 대한 충실함과 연관되어 있고 그 ‘현재’에 사로잡힌 시간에 대한 개인적 정서의 구현에 관계되는 욕망이기도 하다.
갤러리 룩스에서 마련한 이번 기획전시는 자신의 주변에서 만난 익숙한/기이한 타자를 접하는 시선을 모아본 전시다. 회화와 사진을 통해 이들 7명의 작가들은 자신의 일상에서 만난 자연(나무)을 주목해서 그리고 찍었다. 그 특정한 소재인 자연/타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존재다. 그것이 어느 날 자신에게 다가와 감정의 파문을 일으키는가 하면 익숙한 세계에 구멍을 내고 파열음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일상에서 매번 접하는 ‘아무것도 아닌’ 풍경들이 어느 날 낯설고 기이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분명 자신의 내부에서 감지하는, 더구나 욕망하는 힘에 의해 그 대상을 다시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이를 그리는가 하면 사진촬영을 했다. 이들은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다’는 그 현재라는 시제에 만난 것, 어떤 것이 이 순간 바로 내 앞에 있는 현전의 체험에서 문득 낯선 느낌을 받는다.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어느 순간 낯설게 다가옴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강한 힘을 발산한다. 낯섦이란 특정한 외부의 경험에 의해 생성된 내적인 심리상태를 지칭한다. 그들은 자신이 보고 있는 지금의 풍경, 대상을 의심한다. 자신들이 보고 있고,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세계는 아니다. 인간이 감지하는 이 세계 외에 어떤 것을 본다. 일상의 시간 속에서 느닷없이, 불현듯 나타나는 것들을 만난다. 현실세계에 비이성적이고 신화적인 세계가 순간 침입한 것이다. 순간 현실은 금이 가고 이른바 ‘이격(離隔)’된다. 작가들은 그림을 그려나가는 시간 동안 알 수 없는 의문과 지속적으로 대면한다. 결국 그들이 그린 것, 재현한 것은 특정 대상의 외양이 아니라 그로부터 촉발된 자기 내부의 컴컴한 초상이다.
세계는 주체에게는 늘 수수께끼다. 그러니까 카뮈식으로 말하면 부조리하다. 그것은 우리가 배운 언어와 문자의 틀을 유유히 빠져나간다. 지식은 날 것의 세계, 대상 앞에 한없이 무력하다. 외계는 자신의 내부로 들어와 매 순간 암전된다. 참여작가들이 보여주는 재현회화/사진은 보이는 외계의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대상의 모방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으로, 사진으로 보여 지는 것은 화면 밖의 사물과 유사한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출발하여 더 멀리 간다. 조형적 재현이 유사를 내포할 수 있지만, 닮았다는 것이 재현으로 귀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특정 대상에 대한 재현이고, 가시적 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이면을, 세계의 내부를, 자신의 속을 뒤집어 보여준다.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를 관습이 아닌 그것 자체로 생생하게 접촉할 때 생기는 생소함을 그리고자 한다. 그러니까 의미가 소멸된 사물 자체를 바라보게 되는 순간, 순전히 보고 있는 그 자체를 그리는 것이다. 기능과 의미가 지워진 자리에는 기묘하고 낯선 이미지만 남게 된다.
이런 생경한 이미지로부터 사물은 비로소 의미의 대상이 아닌 ‘의미의 주체’가 된다. 알려진 모든 선입견과 편견이 지워진 지점에서의 사물과의 우연한 만남, 맞닥뜨림, 그리고 이로부터 또 다른 가능한 세계와 대면하는 것이 이들의 그림이며 사진이다. 그것은 분명 여기, 이곳의 풍경이지만 동시에 이곳에 없는 풍경이기도 하다. 일상과 비일상 사이에 있는 묘한 풍경이다. 있으면서 부재한, ‘없지 않은’ 그러한 풍경이고, 세계이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 시각과 비시각,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에 위치한 모호한 풍경이 되었다. 모든 대상은 표면, 피부만을 보여주지만 작가는 그 이면을 생각하는 존재다. 그림/사진이란 사물의 외피를 주어진 캔버스나 인화지의 표면 위로 밀착시키는 일이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내부를, 어떤 이면을 암시하는 일이다. 그러니 그것은 너무 ‘깊은 표면’이 된다.
본다는 행위는 헤아릴 수 없는,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 기억 등을 동반한다. 작가는 자신의 신체가 받아 들인 그 지각, 감각을 형상화하고자 그린다. ‘순간적인 느낌들을 재구성’하면서 ‘그것(it)’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응시한다는 것은 모종의 욕망이기도하다. 그 욕망은 사물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것이자 시선이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보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욕망은 충족되거나 실현되기 어렵다. 그러니 미술/예술은 이러한 불가능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작가들은 익숙하지만 알 수 없는 주변의 사물/타자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것들이 뿜어내는 영기를, 놀라운 매혹을 낚아채고자 한다.
작업실의 이사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정리합니다. 평소 정리정돈이 안 되는 사람에게 이사는 좋은 핑계거리이자 기회이기도 합니다. 서랍장 구석에 다이어리 사이즈의 명함첩이 여섯 권이 있습니다. 필름은 정리가 안 되지만 명함첩은 그나마 정리되어 있는 편입니다. 받는 순서대로 넣어 두면 되니까요. 반 정도가 사진관련 명함들입니다. 그 중 이름만대면 알만한 사진가들의 그 옛날 명함을 보고 있자면 그 디자인이나 글꼴이 얼마나 촌스러운지 문득문득 생각나 혼자 웃곤 한답니다. 또한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여러 형태로 사라져 버린 인물들의 명함들을 보고 있자면 온갖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이런 느낌을 사람들은 ‘만감이 교차 한다’고 복잡 미묘하게 표현하나 봅니다.
‘디지털’이라는 상상을 뛰어 넘는 기술력은 사진을 더 이상 사진가를 위한 전유물이 아닌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제관계하의 도제식 교육이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며 간단한 이론서나 실용서로도 쉽게 시작해서 쉽게 사용 가능한 분야가 된 것입니다. 기술력이 우리에게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툴들을 선사한 반면, 획일적인 프린트나 화려한 프레임으로 인해 작가만의 독특한 기법이나 스타일은 점점 더 옅어 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반면 시인들이 찍는 사진은 얼마나 감성적인지 화가들이 찍는 사진은 얼마나 새로우며 기묘한 지 가끔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좋은 이미지들은 수없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또한 전장의 저널리스트들이 찍지 못하는 장면을 현지의 주민들이 스마트폰으로 찍어 올린 이미지들은 얼마나 생생한지 나아가 초단위로 SNS에 올라오는 몇몇 상황들의 이미지들은 여러 분야에서 실제 사용해도 무방할 만큼 좋은 이미지들로 넘쳐나는 시대를 마주한 것입니다.
<장면의 탄생>이라는 전시가 하나 만들어졌습니다. 더 이상 전시의 형태로 사진을 보여준다는 것이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을 하면서도, 역으로 전시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방향성, 시대성, 작업의 맥락적 서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2006년에 <견고한 장면> 이라는 전시를 기획한 적이 있습니다. 작가로도 참여한 작은 전시였지만 한정된 공간, 시간에 어떻게 하면 작품들을 돋보이게 할 수 있을지, 작가들을 어떻게 대하고 초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적지 않은 공부가 된 전시였습니다.
<장면의 탄생>은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대학생의 습작에서부터 아마추어로 시작해 작가 반열에 들어 선 작가들, 의미 있는 작업을 수년째 진행하면서도 제대로 된 기회가 없었던 예비 작가들, 탄탄한 실력으로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묶은 전시입니다. 이 전시는 새롭게 출발하는 갤러리 룩스의 재개관과 함께 합니다. 한 사람에 의해 기획된 전시라는 것이 어차피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보여주는 것임으로, 감히 당대를 대변한다거나 최근 작품의 경향을 보여준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평론가나 기획자가 아닌 작가인 저에게 이 일이 맡겨진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룩스’라는 갤러리의 인사동에서 옥인동으로 이동하는 과정과 전시의 타이틀만 제시하고, 작품의 선택은 작가에게 맡기는 형태의 전시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설명이나 작가의 이름도 들어가지 않는 전시를 만들 예정입니다. 다만 작가의 선정은 가급적 ‘결정적인 순간을 찍는 형식’이 아닌 ‘익숙한 상황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는 형식’의 스타일을 지닌 분들을 모셨습니다. ‘찰나’를 포착하던 시대에서 ‘장면’을 만들어 내는 시대가 온 것처럼 말입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한들 이번 전시는 보는 눈에 따라 그리 새롭지도 않을 뿐더러 명멸하는 수많은 전시 중 하나로 사라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물며 개인전이 아닌 열 명이 넘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니, 제가 가진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바입니다. 언젠가 감동적으로 읽은 선배 사진가의 글귀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나는 전람회장에 들어온 관람객을 압도해 보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대신 작은 소리로 선뜻 느낌을 주거나, 조용하게 설득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전람회에 온 사람들을 보다 오래 사진 앞에서 머물게 하려고 온갖 궁리를 다 한다. 빨리 보고, 바쁘게 전람회장에서 나가게 하는 것이 서비스가 아니라, 오래 머물며 보고 또 보게 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이 갈등 저 갈등, 그리고 여러 시시콜콜한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걸어놓은 작품 앞을 관람객이 단 몇 초 만에 지나가는 것을 보고 행복해 할 작가는 없다. (강운구, 『오래된 풍경』, 열화당, 2011, pp.14-15 발췌)
우리 곁에 있었던 몇몇 사진 갤러리 중 가장 오래되었고 꾸준하게 많은 작가들이 거쳐 간 곳이 바로 갤러리룩스입니다. 이제는 인사동의 삐걱대는 나무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허전하기도 하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옥인동 시대를 응원합니다. 전시가 진행되는 기간 중에 ‘작가와의 만남’ 이라는 밥맛 없는 행사 대신 <사진판 뒷담화 – 안오면 까이고, 와도 까인다(가제)>라는 토론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사진계의 몇 분을 패널로 모시고, 반나절 정도 사진계의 여러 가지 분야에 대한 난상토론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패널들끼리 토론하고 막판에 질문 한 두개 받는 형식의 토론이 아니라, 몇 개의 사안을 패널들이 즉흥적으로 정하고 관객들과 함께 토론할 예정입니다. 형식과 시간이 보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진행되는 만큼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최근에 받은 명함 중 사진가라는 명함이 가장 많습니다. 본업은 변호사나 의사, 탤런트, 회사경영자, 술집점주, 부동산관리 등 실로 다양하지만 본업 말고 사진가의 명함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대가 만들어낸 일종의 로망처럼 느껴집니다. 하긴 사진가가 면허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들의 명함은 또 제 명함첩에 들어갈 것입니다. 저는 또 어딘가 혹은 이 판 언저리에서 왔다 갔다를 하고 있겠죠. 사진이라는 꿈같은 걸 쫓으며 어딘가를 걷고 있을 겁니다.
작업실의 이사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정리합니다. 평소 정리정돈이 안 되는 사람에게 이사는 좋은 핑계거리이자 기회이기도 합니다. 서랍장 구석에 다이어리 사이즈의 명함첩이 여섯 권이 있습니다. 필름은 정리가 안 되지만 명함첩은 그나마 정리되어 있는 편입니다. 받는 순서대로 넣어 두면 되니까요. 반 정도가 사진관련 명함들입니다. 그 중 이름만대면 알만한 사진가들의 그 옛날 명함을 보고 있자면 그 디자인이나 글꼴이 얼마나 촌스러운지 문득문득 생각나 혼자 웃곤 한답니다. 또한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여러 형태로 사라져 버린 인물들의 명함들을 보고 있자면 온갖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이런 느낌을 사람들은 ‘만감이 교차 한다’고 복잡 미묘하게 표현하나 봅니다.
‘디지털’이라는 상상을 뛰어 넘는 기술력은 사진을 더 이상 사진가를 위한 전유물이 아닌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제관계하의 도제식 교육이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며 간단한 이론서나 실용서로도 쉽게 시작해서 쉽게 사용 가능한 분야가 된 것입니다. 기술력이 우리에게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툴들을 선사한 반면, 획일적인 프린트나 화려한 프레임으로 인해 작가만의 독특한 기법이나 스타일은 점점 더 옅어 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반면 시인들이 찍는 사진은 얼마나 감성적인지 화가들이 찍는 사진은 얼마나 새로우며 기묘한 지 가끔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좋은 이미지들은 수없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또한 전장의 저널리스트들이 찍지 못하는 장면을 현지의 주민들이 스마트폰으로 찍어 올린 이미지들은 얼마나 생생한지 나아가 초단위로 SNS에 올라오는 몇몇 상황들의 이미지들은 여러 분야에서 실제 사용해도 무방할 만큼 좋은 이미지들로 넘쳐나는 시대를 마주한 것입니다.
<장면의 탄생>이라는 전시가 하나 만들어졌습니다. 더 이상 전시의 형태로 사진을 보여준다는 것이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을 하면서도, 역으로 전시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방향성, 시대성, 작업의 맥락적 서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2006년에 <견고한 장면> 이라는 전시를 기획한 적이 있습니다. 작가로도 참여한 작은 전시였지만 한정된 공간, 시간에 어떻게 하면 작품들을 돋보이게 할 수 있을지, 작가들을 어떻게 대하고 초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적지 않은 공부가 된 전시였습니다.
<장면의 탄생>은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대학생의 습작에서부터 아마추어로 시작해 작가 반열에 들어 선 작가들, 의미 있는 작업을 수년째 진행하면서도 제대로 된 기회가 없었던 예비 작가들, 탄탄한 실력으로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묶은 전시입니다. 이 전시는 새롭게 출발하는 갤러리 룩스의 재개관과 함께 합니다. 한 사람에 의해 기획된 전시라는 것이 어차피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보여주는 것임으로, 감히 당대를 대변한다거나 최근 작품의 경향을 보여준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평론가나 기획자가 아닌 작가인 저에게 이 일이 맡겨진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룩스’라는 갤러리의 인사동에서 옥인동으로 이동하는 과정과 전시의 타이틀만 제시하고, 작품의 선택은 작가에게 맡기는 형태의 전시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설명이나 작가의 이름도 들어가지 않는 전시를 만들 예정입니다. 다만 작가의 선정은 가급적 ‘결정적인 순간을 찍는 형식’이 아닌 ‘익숙한 상황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는 형식’의 스타일을 지닌 분들을 모셨습니다. ‘찰나’를 포착하던 시대에서 ‘장면’을 만들어 내는 시대가 온 것처럼 말입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한들 이번 전시는 보는 눈에 따라 그리 새롭지도 않을 뿐더러 명멸하는 수많은 전시 중 하나로 사라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물며 개인전이 아닌 열 명이 넘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니, 제가 가진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바입니다. 언젠가 감동적으로 읽은 선배 사진가의 글귀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나는 전람회장에 들어온 관람객을 압도해 보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대신 작은 소리로 선뜻 느낌을 주거나, 조용하게 설득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전람회에 온 사람들을 보다 오래 사진 앞에서 머물게 하려고 온갖 궁리를 다 한다. 빨리 보고, 바쁘게 전람회장에서 나가게 하는 것이 서비스가 아니라, 오래 머물며 보고 또 보게 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이 갈등 저 갈등, 그리고 여러 시시콜콜한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걸어놓은 작품 앞을 관람객이 단 몇 초 만에 지나가는 것을 보고 행복해 할 작가는 없다. (강운구, 『오래된 풍경』, 열화당, 2011, pp.14-15 발췌)
우리 곁에 있었던 몇몇 사진 갤러리 중 가장 오래되었고 꾸준하게 많은 작가들이 거쳐 간 곳이 바로 갤러리룩스입니다. 이제는 인사동의 삐걱대는 나무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허전하기도 하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옥인동 시대를 응원합니다. 전시가 진행되는 기간 중에 ‘작가와의 만남’ 이라는 밥맛 없는 행사 대신 <사진판 뒷담화 – 안오면 까이고, 와도 까인다(가제)>라는 토론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사진계의 몇 분을 패널로 모시고, 반나절 정도 사진계의 여러 가지 분야에 대한 난상토론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패널들끼리 토론하고 막판에 질문 한 두개 받는 형식의 토론이 아니라, 몇 개의 사안을 패널들이 즉흥적으로 정하고 관객들과 함께 토론할 예정입니다. 형식과 시간이 보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진행되는 만큼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최근에 받은 명함 중 사진가라는 명함이 가장 많습니다. 본업은 변호사나 의사, 탤런트, 회사경영자, 술집점주, 부동산관리 등 실로 다양하지만 본업 말고 사진가의 명함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대가 만들어낸 일종의 로망처럼 느껴집니다. 하긴 사진가가 면허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들의 명함은 또 제 명함첩에 들어갈 것입니다. 저는 또 어딘가 혹은 이 판 언저리에서 왔다 갔다를 하고 있겠죠. 사진이라는 꿈같은 걸 쫓으며 어딘가를 걷고 있을 겁니다.
<명랑한 기억>은 단편적인 삶 속에서 의미 있는 순간을 발견하고, 이를 시각이미지로 환원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모았다. 그들이 생산한 시각이미지 뿐만 아니라, 작업의 모티브로 작용하는 태도에 주목하고자 한다.
우리는 삶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맺고, 평범한/특별한 사물과 풍경을 마주한다. 인간관계, 일상의 사물과 풍경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게 하고, 무수한 말들을 쏟아내게 한다. 무엇보다 그러한 경험에 의해 특수한 감정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그 감정에 따라 삶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사소하고/ 우울하고/ 고단하고/ 외롭게 느껴진다. 어떤 이는 전자보다 후자의 감정을 빈번하게 느꼈을지 모른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우리가 ‘삶’에 대해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은 이미지를 근거로 ‘삶’을 판단하기 때문에 후자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무의미한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유의미한 이미지를 기억하지 못해 삶이 사소하고/ 우울하고/ 고단하고/ 외롭게 느끼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진단에 따라 처방을 내린다면, 의미 있는 순간들을 흐리지 않게, 밝고 환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시각이미지는 대상을 기억하거나 경험을 보전하기 위해 고안된 방식들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시각이미지를 생산하는 이들은 보통의 사람보다 주어진 삶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망각되기 쉽지만 의미 있는 순간을 포착한다. 반복되는 것과 결코 반복될 수 없는 것들이 공존하는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반성하는 차원으로 나아간다. 결과적으로 일상이라는 얇은 표면에서 발견되는 미세한 차이와 굴곡을 읽어내 ‘지금-여기’를 보여준다.
‘지금-여기’란 커다란 테두리인 거대담론일 수도 있으며, 미묘하고 개인적인 미시담론일 수도 있다. <명랑한 기억>은 담론의 형태보다는 평범한 순간의 이미지로, 밝고 유쾌하면서도 우울하고 진부하게 다가갈 것이다. 그러나 이를 명랑하게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하게) 시각화하는 구현모, 노석미, 노정하, 사타, 홍인숙의 삶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삶의 태도를 닮은 시각이미지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며, 또한 우리에게 ‘괜찮다’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우리의 삶은 명확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상투성과 그로부터 오는 우울함을 견뎌내기 위해서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하게’ 유의미한 이미지를 기억한다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며 선보여왔던 연례기획전 Flux는 끊임 없이 변화하는 지금의 한국 현대미술가의 다양한 입장과 시각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그 일련의 흐름을 읽어내고자 기획되어왔다.
편지와 전보가 사라진 자리에 전화기와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폰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말을 전한다. 오늘날 종이위에 자신의 필치로 문자를 써내려간 편지를 남기는 이는 거의 없어졌다. 포스트잇에 쓴 간단한 메모라면 모를까 필적을 가늠할 편지는 더 이상 구경하기 힘들어졌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에 사람들은 편지와 전보를 통해 구구절절한 사연을 남기며 먼 곳의 그 누군가와 간절한 소통을 갈망했었다. 오히려 당시의 문장들이 여전히 가슴을 저미게 하는 힘이 있다. 문자들의 진정성이 살아있다. 이제는 스마트폰의 자판에 닭이 모이를 쪼듯이, 손가락을 찍어가면서 단축된 대화를 이어가거나 압축된 말을 전한다. 상대방의 음성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즉물적인 문자만이 줄을 잇는다. 자신의 복잡한 내면이나 굴곡 심한 감정의 상태를 울려주는 목소리를 지우는 한편 상대방의 성대에서 번져 나오는 소리에 일일이 응답하거나 반응하기에 피곤해 하며 건조한 문자, 혹은 무의미한 단어들만을 던진다. 소통의 수단과 그 편리성은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소통으로 기능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소통이 흘러 넘치는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소통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통때문에 힘들어하고 상처를 받는다. 너무 많은 말들이, 말도 되지 않는 말들이, 거짓된 말들이 진실을 뒤덮고 있다.
성정원은 모르스 부호 이미지와 컵을 이용한 작업을 통해 ‘소통’에 대해 질문한다. 그녀는 디지털프린트 된 모르스 부호를 벽면에 가설하고 천장에는 컵을 뒤집어서 매달았다. 그것은 마치 갓을 쓴 알전구처럼 늘어져있다. 벽면에는 그림을 그리고(벽에 부착한 프린트) 종이컵은 바닥을 향해 내려져있다. 컵의 내부, 바닥은 하나의 점이고 원이다. 아랫면보다 넓고 큰 컵의 윗면(원형)을 귀에 갖다 대면 모르스 부호음이 울린다. “뚜우-뚜-뚜우-뚜뚜뚜뚜뚜”
그 소리는 추억과 향수를 아련하게 떠올려주는 신호음이다. 모르스 부호음을 듣게 된 것이 얼마만일까? 가끔 항해중인 선박에서 아직도 저 작은 쇳덩어리를 통신장의 손가락으로 눌러가며 길고 짧은 소리를 내기도 하겠지만 지금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통신수단이고 소통의 도구였다. 화가이자 뉴욕대학의 교수였던 사무엘 모르스는 1844년 자신이 발명한 전신기과 모르스 부호를 사용해 처음으로 타전에 성공한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긴급전문을 보낼 때 사용하던 통신방식이기도 했던 모르스 부호는 상대에게 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 또 가장 강력한 방식이었다. 길고 짧은 음을 반복하고 선과 점으로만 이루어진 이미지를 지닌 이 모르스 부호는 그 시절 세계인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용 언어였다. 쇳덩어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전기를 보내고 이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바꾼 모르스 부호는 장음과 단음으로 통신을 하는 1차원적인 통신 방식이었다. 또한 그 부호 이미지는 완전한 추상언어다. 점(원)과 선(직선, 사각형)으로 모든 것을 환원한 모습은 그대로 모더니즘의 조형언어이기도 하다.
성정원은 그 모르스 부호를 벽면에 횡으로 부착하는 한편 그 소리를 컵을 통해 은밀하게 들려주는 공간을 가설했다. 벽에 그려진 그림(벽화)과 일상용 오브제인 컵, 그리고 소리가 모두 모여 있다. 회화와 조각, 음향이 어우러진 설치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음향으로 들리는 모르스 부호가 이미지화되는 순간 특정한 의미체계를 지닌 문자가 된다. 이미지가 문자로 탈바꿈하고 변이를 일으킨다. 그 이미지는 점과 선으로만 형성되었고 점과 선의 교차와 배열의 변수들이 모여 가장 단순하면서도 선명한 소통기호, 그림을 만들어준다. 전시장의 흰 벽을 배경으로 점과 선들이 벽에 일렬로 배열되어 퍼져나간다. 마치 소리가 울리듯이, 파장을 일으키듯이 이어진다. 그것이 그친 자리에 작게 쓰여진 문장이 그 모르스 부호가 무슨 뜻인지를 지시한다. “조용히 해주세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엄마 아빠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등의 문장이다. 어딘지 간절하고 슬프고 아련하다.
벽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걸려있는 종이컵을 집어 들고 귀에 갖다 대면 그 모르스 부호음이 들린다. 컵은 스피커가 되어 소리를 증폭시켜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집중시킨다. 물을 담아먹거나 음료수를 마시기 위해 사용하는 일회용 종이컵이 순간 미지의 신호음을 발산하고 아득한 시간의 추억을 상기시켜주면서 청자의 귀를 독점한다. 오로지 컵과 그 컵에 귀를 맡긴 누군가의 고막만이 독대하는 순간이다. 컵의 윗부분은 온전히 귀를 감싸고 그 귀를 소리에 집중시킨다. 그는 자신의 온 몸이 하나의 귀가 되어 그 컵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한 개인의 몸이 컵에 담긴 형국이다. 청자는 단순한 신호음을 주의 깊게 경청하며 그 미지의 신호음이 발산하는 의미체계를 막연하게 추측할 것이고 그러다 문득 벽면에 쓰여져 있는 문자를 보면서 비로소 모르스 부호음이 무슨 내용인지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이제는 잊혀지고 사라지는 모르스 부호라는 소통의 체계를 끌어들여 아득한 먼 곳의 누군가와 전기신호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소통하려 했던 당시의 간절한 욕망을 문득 상기시켜준다.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와 소통을 해야 살며 살기위해서 무수한 소통은 또한 요구된다. 그러나 우리는 매순간 그 소통의 불통과 불확실성에 대해, 그리고 소통의 좌절에 따른 절망감과 오독에 대해 상처를 받거나 곤혹스러워한다. 인간과 인간이 이룬 문자와 다양한 기호체계들이 과연 인간의 진정한 소통을 어디까지 가능하게 할 수 있을 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소유하며 그것을 갖고 수시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또한 그것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워하는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사회는 여전히 소통되지 못하는 단절과 소외 속에서 고독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좀 더 경청하고 주의 깊게 들어야 하며 더불어 진실된 말과 소통 가능한 언어의 사용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말이 왜곡되고 일방적인 소통이 강제되는 시대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소통’인 셈이다. 성정원의 이 매력적인 설치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새삼 소통의 진정성과 그 간절함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문득 내 몸이 하나의 귀가 되어 컵 안에 마치 태아처럼 잠기는 꿈을 꾼다. 양수 속에서 듣던 어머니의 내부와 그 밖의 세계에 귀 기울이며 웅크려있던 그 시절을 상상한다.
흑백 적외선(Infrared Ray, 赤外線) 사진 작품인 ‘공원’은 불교 철학 개념인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무한함을 지니고 있는 빛은 무색(無色) 즉, 공(空)입니다. 그 공 안에 색(色)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색의 본질은 공인 것입니다.
작품 속 풍경은 인간의 손길이 닿아 ‘조경(造景)’이 된 공원의 ‘차별(差別)’된 풍경과 자연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낸 ‘무차별(無差別)’의 풍경입니다. 비슷한 공원 풍경을 적외선이라는 인간은 볼 수 없는 광선의 힘으로 그려낸 일상의 풍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여줍니다. 일상의 현실적 풍경이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낯설어 보이지만 그것이 현실 풍경 속 풍경에 숨어있는 또 다른 현실임을 우린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본다’라는 것은 ‘인식한다’의 의미입니다. 볼 수 있고 그것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고 표현 할 수 있는 것은 신의 축복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각은 보여지는 사물(事物)의 모습에만 집착한 나머지 나타나지 않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는 지엽한 시각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사물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채 보여지는 것에만 의존하게 되어, 결국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만이 진실이라는 ‘무지(無智)’를 신앙(信仰)하게 되는 오류에 침식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즉흥적 감각에 의존한 시각만이 아닌, 다양함을 이해하는 안식(眼識, Light sense)을 갖고, ‘어린 왕자’와 같이 ‘마음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현실의 빛’ 과 ‘비현실의 빛’이 상충(相衝)하는 풍경이 아닌, 대상을 소유의 가치가 아닌 공존의 존재로 모두 아우를 수 있을 것 입니다.
양호상, Stereogram, 2013. 8. 7 – 8. 19
학창시절 나를 표현하기 위해 옷을 입었다. 그럼에도 나와 친구들은 같은 잠바, 남방, 면바지, 힙합스타일, 모두 비슷한 패션이였다.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유명연예인 스타일, 명품 등 3~4명의 한 명 꼴로 비슷한 패션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인지 나는 편집적으로 사람들의 ‘패션’을 시선에 담는 버릇이 생겼다.
이런 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패션’, ‘산업’, ‘사회’가 어떤 관계를 갖는지 바라보게 되었다. 산업발달 이 후 대량생산된 ‘패션’은 사용가치보다 미적가치에 비중을 두고, 유행을 통해 발전했다. 이를 통해 ‘패션’은 기본적 의미를 벗어나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패션을 통해 고급과 저급, 미와 추, 부와 가난등과 같은 용어들이 전달되는 사회적 용어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언제부턴가 우리는 사회적 정체성과 개인의 정체성 구분이 모호해져 살아가고 있다.
‘Stereogram I’은 그 시작점인 산업발달 이후 모던사회까지의 프린팅, 패턴등 다양한 형태로 유행한 ‘패션’을 특징적 역사와 기억을 드러내기 위해 그 당시의 Object를 사진적으로 기록하고 미술적 기법인 Op-Art를 차용하여 표현 함으로써, 패션과 사회를 의심해보고 패션을 통해 사회적 평등화 경향과 개인적 차별화 경향의 타협을 고민해보고자 하였다.
원범식, Archisculpture, 2013. 8. 21 – 9. 2
르네 데카르트는 한 명의 건축가가 이뤄낸 건물의 질서정연함을 아름답다 하였지만, [건축조각] 사진 프로젝트는 여러 건축가의 다양한 설계를 모아 하나의 거대한 조각을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 조각은 자연발생적으로 여러 건축가에 의해 이루어진 고대도시의 유기적 낭만성과 성격이 비슷하기도 하고, 또 다르기도 한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다수 건축가의 건축물에 대한 매우 주관적인 본인만의 미해석이기 때문이다. 사진에 ‘푼크툼’이 있다면 분명 내가 선택한 건축물의 일부 요소는 본인의 진실한 ‘푼크툼’이며 이들의 조합이 바로 [건축조각] 사진이다. 다양한 형태의 건축요소들은 결국 하나의 거대하고 새로운 조각으로 재탄생한다. 또한 [건축조각] 사진 프로젝트는 대도시 ‘판타스마고리아’의 꼴라주다. 다만 인간의 환상, 욕망이 잘 구현된 아케이드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 환영을 찾아 이를 서로 연결한 하나의 거대한 조형물이다. 감상자는 이 사진들로부터 대도시의 환영을 느낀다. 수집가가 획득물을 조심스럽게 분류하고 정리하듯, 이곳 저곳에서 채집한 도시의 파편들을 분석하여 하나의 조각작품으로 재조립한다. 다양한 형태의 건축요소들은 하나의 거대하고 다양한 역사를 지닌 조각예술로 재탄생한다.
[건축조각] 사진 프로젝트는 따라서 매우 상징적이다. 정치와 경제, 문화의 연관관계, 물신자본주의사회의 건축적 환등상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하며, 작품에 사용된 꼴라주, 즉 몽타주 기법은 러시아 영화감독 에이젠슈타인이 언급했듯이 각각의 요소들을 충돌시키면서 새로운 의미 즉,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사회현상과 구조를 서술하며 기존의 거대보편구조나 암묵적 상식을 끊임없이 해체한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건축적 조각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