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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자, 다른 상념들은 사라진다
곽노원
몰입을 위한 전당을 흉내 낸 어스름한 방. 등받이도 없는 의자 비스무리 한 것에 어수룩하게 앉아, 이렇다 할 입장과 퇴장 시간도 없이 시작과 끝이 접붙어버린 영상을 바라본다. 새로 들어오는 관객, 자리를 떠나는 이, 중첩되는 소리들, 프로젝터의 희끄무레한 빛, 부침을 반복하는 스크린의 경계, 그 동인이 무엇이든 이내 시선은 갈피를 잃거나 기를 쓰고 초점을 맞추려 한다. 물론 비단 영사를 지지하는 물리적 조건들만이 문제는 아니다.
5년인가 6년 정도 전, 날이 매서워지는 무렵이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혹은 그렇지 않을지도. 하루나 이틀만 지나도 기억은 지표를 잃는다. 작업은 신발을 만드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 기억한다. 실패가 여럿 걸린 재봉틀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 같다. 그 이미지들을 (앞)뒤로 하고 어떤 이가 고단한 어투로 자신의 실패를 읊조렸다. 딱히 구체적인 실패의 이유 따위는 없었다. 다만 단조롭고 어눌한 발음의 목소리가 실패의 징후를 여실히 흘리고 있었다. 이것은 자전적 이야기다, 하고 단정했다. 작가를 소개받았던 것 같지만, 여느 오프닝이 그렇듯 무수한 인사만 남을 뿐 사람은 남지 않았다.
혹자는 이 영상들의 독특한 이미지가 갖는 강렬함, 왜곡, 평범하지 않음과 직접성이 다른 곳이 아닌 문화의 보관소에 들어와 있을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이루는 흐름의 비서사성, 은유성, 지루함과 단속성이 이 ‘영상’들의 가치와 특성을 결정짓는다고도 말해진다. 그것은 옳은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 ‘영상’들은 명멸하고 스쳐지나가며 그 흐름은 은유를 타고 끝없이 미끄러진다. 종내 누구도 만장일치로 끄덕일 수 없으나 그 어떤 것보다도 명확한 지점을 향해 끊임없이 끌고 들어가려 한다..
돌이켜 보면, 작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물론 모든 만남은 우연일지 모른다. 필연 따위는 우연의 연속 끝에 마지막에서야 발견된다. 어쨌거나 마주하고도 작가를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 이후로부터는 꽤나 긴 시간을 두고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많은 이야기를 했고 한 번의 전시를 했다. 혹은 한 번의 전시는 많은 이야기를 위한 핑계였는지 모른다. 아니면 많은 이야기는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몇 번의 개인전, 참여하는 대부분의 기획전에 열심히 들렀던 것은 단순히 우리가 가까운 동료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두 가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나는 작가의 작업이 사소설과 유사한 차원의, 자전적 독백만일 것이라는 단정이 옳지않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하나는, 동일한 차원에서, 작가의 이야기로 치부되는 작품과 작품 속 인물의 이야기가 왜 너무도 익숙한 일들로 이해 되는지였다. 익숙한 차원을 넘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기억이나 이야기가 나도 모르는 새에 불쑥 튀어 나와 있는 것과 같은, 작품이 주는 묘한 기시감의 원인을 확인해야 했다.
이미지와 소리가 흘러간다. 강렬하나 불분명한 이미지들이 미끄러지듯 결합해 자신들만의 당위적인 쳇바퀴를 굴린다. 하나의 이미지를 장면을 시간을 보낼 때마다 우리는 다음 이미지와 장면, 시간과 마주하며 그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애쓴다. 쳇바퀴의 구름 끝에 있을 어떤 이야기의 완성된 종결을 예측하기 위해. 하지만 시선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들은 이내 흐릿해지고, 눈앞의 것들은 그 안개 속으로 쉬이 빨려 들어간다. 그 와중에 다가올 이미지, 장면, 시간들은 찰나적으로 눈에 닿아 금세 흐릿한 저편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까지는 짐작만이 가능할 뿐이다. 결국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읽기’ 위해서는, 바꿔 말해 모든 이미지를 눈앞에 펼쳐 놓은 것처럼 ‘보고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한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작가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 한 화자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있다 해도, 모든 것을 자신의 기억으로 환산하는 주도적인 화자가 있다. 다만 화자가 내뱉는 말들에는 어떤 구체적인 사건이 없다. 그래서 그 말들에는 어떤 특정한 순서를 구별할 만한 기준들이 없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을 수식하는 데에는 항상 ‘서사’라는 단어가 따라 붙는다. 시간이나 사건의 흐름 혹은 그와 유사한 순서. 각각의 작품에서 그 ‘서사’를 찾아보려 애쓴다. 물론 매번 발화가 시작되는 어떤 맥락이 틀처럼 존재한다. 연인으로부터 배신당한 30대 무렵의 세일즈맨, 아버지에게서 구식 전파상을 물려받은 한 고독한 사람, 오랜 연애 끝에 위기에 처한 연인들, 절망의 기로에서 탈출구를 바라고 있는 남자, 잘난 연인에게서 자신의 허물을 보는 사람, 돌연 사라진 천재 건축가에게 스스로의 불안을 투영하는 이. 그러나 모든 화자의 이야기에는 뚜렷한 시작도 결말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하다. 무한히 보는 것은 무한한 시간으로 있는 것, 무한한 시간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영상이 놓인 곳의 열고 닫음의 시간과 동시에 생에 주어진 시간의 유한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흘러가는 시간만큼을 감내한다. 끝내 남는 것은 이미지의 흐름에서 눈을 뗀 순간을 딛고, 이미 지나가 벌써 흐릿해지기 시작한 기억들을 긁어모아 내리는 사후적 판단뿐이다. 혹은 종결된 시간을 한 눈에 바라보며 기록된 묘비명과 같은 텍스트로부터, 이미 속절없이 지나가고만 영상의 궤적을, 그 ‘의도’를 확인할 수밖에는 없다.
다만 이들의 고백에서 집요하도록 반복되는 것은 좌절로 각인된 과거, 뚜렷이 잡히지 않는 흘러간 나날에 대한 회환들, 속절없이 손을 빠져나가는 나날들, 예측할 수 없이 펼쳐진 시간에 대한 불안, 그 뿐이다. 이미 존재하던 이미지이던 혹은 직접 촬영된 것이던 길어올려진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미지. 그 위에 덧씌워진 이국적이고 어수룩한 나레이션. 이들은 미미한 지시적 관계나 우연한 관계로 접붙어 있다. 하지만 화자가 토로하는 삶의 상실감과 불안 속에서 일종의 개연성을 지닌 ‘서사’로 발견 된다. 따라서 이 영상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것, 읽어내야할 것, 대단원에 다달아 앞에서 보았던 것들을 종합해 확인해야 하는 의미 따위는 없다. 따라서, 그 덕분에, 우리가 작품에서 마주할 것은 모조리 읽어나 감각하기엔 넘치는 눈앞의 이미지와 그래서 언제나 놓친 부분이 있는 지나간 이미지, 그리고 새로이 밀려올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의 시간들, 즉 영상을 마주 앉아 있는 불안한 시간이다. 그것은 동시에 영상 앞에 다다르기까지의 우리의 기억들, 시간들을 인양한다.
나는 그의 작품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보았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 내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내 자신과 내 미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시간을 버티기 위해 애쓰고 있다.* <모든 사람은 수수께끼>, 2020, 단채널비디오, 사운드, 컬러, 18:09

w : r. 08-19
김도균 KDK
김도균
KDK (b. 1973)
서울예술대학교 디자인학부 사진전공 교수 재직
2009
아카데미브리프(크리스토퍼윌리암스),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 독일
2006
마이스터쉴러(토마스 루프),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 독일
1999
서울예술대학 사진과 졸업
개인전
2019
w : r. 08-19, 갤러리 룩스, 서울
2018
sf.lu.p.t, 갤러리 비케이, 서울
201720110326-20171214 instagram@kdkkdk20171215-20171231, 상업화랑, 서울
또는 뒤돌아보고, 4특004_ㅋㅋㄹㅋㄷㅋ, 서울
2016
out of in, aando fine art, 베를린,독일
2015
p, PERIGEE GALLERY, 서울
2014
KDK b.ios.lu.sf.w., 신세계백화점 본관 아트 월, 서울
2013
2013 : A Space Odyssey, KAIST 경영대학 SUPEX, 서울
2012
b, 갤러리 2, 서울
2011
Facility Skins, Michael Schultz, 베를린, 독일
Space Faction, MK2 Art Space, 베이징, 중국
2010
Flowingscape,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갤러리, 서울
Line Up, 갤러리 2, 서울
SF, 갤러리 미고, 부산
2009
KDK, 구지갤러리, 대구
2008
New SF, 갤러리 2, 서울
W, 갤러리 2, 서울
2006
SF, 원앤제이 갤러리, 서울
Images of Speed, 서미앤투스, 서울
2005
Images of Speed, 갤러리 Delank, 쾰른
2000
SK갤러리, 서울
단체전
2019
Civilization : The way we live now,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멜버른, 호주
낯선 시간의 산책자, 뮤지엄 산,원주
로드쇼:상하이에서 충칭까지, 토탈미술관,서울
다음 전시 준비중, 갤러리 플래닛, 서울
기하학, 단순함을 넘어, 뮤지엄 산, 원주
Civilization : The way we live now, UCCA, 베이징
풀이 선다, Art Space Pool, 서울
2018
옵세션, 아르코미술관, 서울
photo, minimal, 갤러리 룩스, 서울
문명 : 지금 우리가 사는 방법,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Unclosed Bricks : 기억의 틈, 아르코미술관, 서울
Salon de nook gallery, 누크갤러리, 서울
EnSuspens, Galerie Berthet-Aittouares, 파리, 프랑스
The third print : 호모 아키비스트작가의 개입, 도잉아트, 서울
도시유희, 021갤러리, 대구
2017
Mobius stripe, ONE AND J갤러리, 서울
Love and Stripe, AK 갤러리, 수원
별의 별, 경남도립미술관, 창원
삼라만상 : 김환기에서 양푸동까지,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6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30년 특별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Inner space, 아뜰리에 아키, 서울
사진 : 다섯 개의 방, 두산 갤러리,서울
말 없는 미술, 하이트 컬렉션,서울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 1989년 이후 한국현대미술과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Making is Thinking is Making – New Korean Craft, 2016 밀라노 트리엔날레, 밀라노, 이탈리아
상상공간,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 고양
74cm, 누크 갤러리, 서울
A Photograph Rarely Stands Alone. Pairs, sequences, and series from the Kunstbibliothek’s
Collectionof Photography, Museum fuer Fotografie, 베를린, 독일
2015 나는 불꽃이다, 서울, 63아트 미술관, 서울
한국건축예찬-땅의 깨달음,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
Shadow of Objects, COS, 서울
거짓말의 거짓말, Huis met de Hoofden,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온고창신-우리 과학 들여다보기, 경운박물관,서울
회동담화, 예술지구p, 부산
1970,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후, 환기 미술관, 서울
은밀하게 황홀하게, 문화역서울 284, 서울
거짓말의 거짓말, 토탈 미술관, 서울
Birth of a Scene, 갤러리 룩스, 서울
2014
AFFINITY 90, 갤러리 조선, 서울
Road Show SILKROAD, 주한중국문화원, 서울
Well-constructed:contemporary photography from Korea, 안도 파인아트, 베를린 독일
Space Gardening, gallery planet, 서울Semi close up, 동교동, 서울두 가지 현상, LIG Art space, 서울
Re-imagination, 일우 스페이스, 서울
2013
Nivatour 2, Korea-Nigeria : A friendship over decades, 토탈 미술관, 서울
The show must go on, Lasalle, 싱가포르
장면의 재구성#1_Scenes VS Scenes,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
What if project –Barter Center for images of CoreaCamparella, 아마데우스호텔, 베니스, 이탈리아
Flat in Flat, Flat, 서울
조작의 정체, 화이트블럭, 파주
외 다수
레지던스
2017
cite international des arts, 파리, 프랑스
2016
ISCP, 뉴욕, 미국
2013
토탈미술관 + 도미노프로젝트 레지던시, 자그레브, 크로아티아
2010 – 2011
국립 미술창작 창동스튜디오, 서울
2009-2010
난지 미술창작 스튜디오, 서울
컬렉션
Kunstbibliothek Staatliche Museen zu Berlin, Photography Collection, 독일
IKB Deutsche Industriebank, 독일
UBS, 스위스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
마리오보타 컬렉션, 프랑스
미술은행, 서울
서울시립 미술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눈이 온 뒤 After the snow
노석미 noh seok mee
작가노트
눈이 온 뒤
“우리나라의 겨울 시골 풍경이라는 게 초라하기 그지없지. 스산하고. 왜냐하면 초록이 사라지기 때문이지. 게다가 논이 많아서 벼를 베어버리고 난 뒤의 논 풍경은 정말이지 쓸쓸하게 느껴진다고.”
귀가 시릴 정도의 매서운 바람이 불고 공기는 차갑다. 사방을 둘러봐도 움직임이 있는 생명체를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 이 추운 날씨에 어딘가에 숨어서 견디고 있겠지. 그렇게 건조하고 추운 날들이 반복되다가 갑자기 바람이 멈추고 공기가 촉촉해진다. 하늘이 흐려지고 나의 눈도 뿌옇게 초점을 잃는다. 잠시 후, 눈이 내린다.
눈은 스산했던 풍경들을 덮어준다. 그래서인가. 눈이 오면 따스하다. 갑자기 옷을 바꿔 입은 다른 세상이 나타난다. 모든 것이 환하게 변한다.
‘아…눈이 부시다.’
눈이 온 뒤, 눈 풍경도 주울 겸 산책길에 나선다. 집에 돌아와 눈이 그린 그림을 나도 따라 그린다.
눈이 많이 내린 다음날, 귀에 이어폰을 꽂고서 길을 나선다. 걷는 그 길엔 눈과 음악이 있다. 누군가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참 슬플 거 같다. 어쩐지 미래라는 말이 나는 항상 슬프게 들린다. 미래를 걱정하는 현재의 삶을 달래어줄 수 있는 것은 하얀 눈과 음악뿐이란 생각이 든다.
산책길은 별로 특별하지 않다. 집을 나서 길로 들어선 후 어느 방향이던 걸으면 된다. 차가 다니는 길을 피해 주로 농로를 걷거나 둑길을 걷는다. 이렇게 눈이 온 뒤엔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길은 어쩌면 의미가 없다. 개울이 얼고 그 위에 눈이 쌓여 있어 길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개울만 헛디디지 않으면 된다. 찻길과 농경지, 작은 개울, 간간이 집들, 축사 그리고 먼 산, 가까운 산 등이 보인다. 안 그래도 없지만 추운 겨울날, 더더욱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이 눈으로 덮여있다. 지저분한 것들은 다 사라졌다. 눈 위를 걷는 걸음이 가볍지는 않다. 뿌드득 척 뿌드득 척 뿌드득 척 하고 걷는다. 내가 걷는 건지 신발이 걷는 건지 잘 모르겠다. 신발아.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렴. 콧김, 입김이 난다. 털모자를 쓴 머릿속에서도 김이 난다. 그리고 점점 발이 축축해져온다.

The Night is Young
유재연 Jaeyeon Yoo
작가노트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밤의 사유들
어느 날인가 부터, 낮에는 일을 마치고 밤에 작업실을 드나드는 나의 일상을 생각하며 환상 문학가들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다. 문득 그들이 경험한 밤의 세계는 어떠하였을지 궁금해졌다. E.T.A 호프만1)과 프란츠 카프카2)를 떠올려본다. 낮에는 본인들의 업을 위해 일터에 나가고 밤에는 책상 앞에 앉아 기이하고도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써 내려간 그들의 세상을 생각해본다.
그들의 밤과 지금 나의 밤은 무엇이 다를까?
나의 작업은 ‘기억해내기 힘든 아주 어릴 때의 기억부터 어렴풋이 생각나는 유년기, 그리고 청소년기의 불안한 감수성이 현실 사회에서 어떻게 현재화되어 구체화되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는 나의 작업에서 개인의 불안과 고독이 환경과 사회의 기능적 역할과 수반되며, 어떻게 상충하고 현실에 대한 개인의 체험과 인식이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어떻게 탈-경계적으로 재구성되는지 연구함으로써 표현된다. 정신분석으로도 해명할 수 없는 암묵적인 유년기의 장소와 기억, 그리고 유년기적 환상과 불안사회의 혼합물들을 전시공간으로 끌어들여 기억-현실-현대미술의 순환구조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려 한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는 작업들은 개인이 구축한 상징계와 현실사회의 실재계가 만나 생기는 부스러기들이라 말 할 수 있다. 개인으로부터 생성되는 상상계가 끊임없이 확장되는 밤의 세계에서의 환상적 경험과 단절과 교류라는 양가적 특성을 가진 현실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립될 수 있는 자유와 사회적 교화에 의한 압박이 충돌했던 경험들을 환기시킬 수 있는 플랫폼이 되기를 바란다.
작가의 시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부터, 나는 내가 맞이하는 이 세계의 모든 간극에 주목하게 되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 세계의 모든 간극이란 곧 어른과 아이의 괴리, 현상과 실재의 괴리, 일과 놀이, 사회와 환상, 공포와 꿈, 가정과 사회, 지식과 감정 등의 괴리이다. 내가 보는 것과 똑같이 펼쳐지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세상은 항상 조금씩 갈라져 있으며, 그 갈라진 틈 사이로 나는 표피 아래의 것들을 들여다본다.
________
1) E.T.A 호프만은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이자 작곡가이다. 그는 그림과 음악에 뛰어났고 대법원 판사를 지냈다. 그 후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공상적이며 마법적인 기괴한 것이 많았다.
2) 프란츠 카프카 또한 법학으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여 프라하의 보험회사에 법률고문으로 취업했지만 그의 일생의 유일한 의미와 목표는 문학창작에 있었다. 남아있는 편지에 따르면 그는 회사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글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핵으로 죽기 2년 전까지 보험회사에서 법률고문으로 근무하며 퇴근 후에는 밤늦도록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Fruits and Grains
김수강 Sookang Kim
김수강
Kim Sookang
1970
서울 출생
1993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한국
1998
프랫 인스티튜드 대학원 사진전공 졸업, 미국
개인전
2019
Fruits and Grains, 갤러리 룩스, 서울
2018
완전한 질서, 갤러리 서이, 서울
2016
김수강, 소울 아트 스페이스, 부산
김수강, 레이블 갤러리, 서울
Stil Life – 김수강, 프린트 베이커리, 서울
2014
Towels, Shelf, 공근혜 갤러리, 서울
2008
Stones, 공근혜 갤러리, 서울
Stones & Vessel, Gallery339, 필라델피아, 미국
2007
김수강, 공근혜 갤러리, 서울
2006
White Vessel, 공근혜 갤러리, 서울
2005
Bojagi, 갤러리 빨강 숲, 서울
김수강, 백해영 갤러리, 서울
2003
In my hand, 성곡 미술관, 서울
2000
Being, 갤러리 룩스, 서울
1998
Trivial stories, 갤러리2000, 서울
1997
Odes Things, Steuben West Gallery, 뉴욕, 미국
1993
녹, 갤러리 인데코, 서울
주요 단체전
2018
AWAKE 눈을 뜨다, 루시다갤러리, 진주
프레임 이후의 프레임: 한국현대사진 운동 1988-1999, 대구미술관, 대구
2017
라벨과 미술의 연결고리, 레이블갤러리, 서울
Mixed lights, 신세계갤러리, 서울
Long Life, 경북대미술관, 대구
2016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 1989년 이후의 한국현대미술과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Things and Places, PIU 갤러리, 서울
Selscted edition: Art & Design, 신세계갤러리, 부산
2015
소울 아트 스페이스 10주년 기념전, 소울 아트 스페이스, 부산
Kitchen In Fantasy , 호림미술관, 서울
Gaze: Contemplative Mind to Objet , Hue Gallery, 싱가포르
Korean Contemporary Photography, Gallery of Classic Photography, 러시아
Parallel Encounter – 김수강, 하형선 2인전, Gallery JH, 서울
사진의 기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4
Trace-Sookang Kim & Sanggil Lee, 갤러리플래닛, 서울
Diffrent Dimension – 러시아 국제 사진 페스티벌, Novosibirsk State Art Museum, Novosibirsk, 러시아
2013
Paris Photo, LA, Paramount Pictures Studios, LA, 미국
2012
More Photos about Buildings and Food, Gallery 339, Philadelphia, 미국
2011
The Gaze of the Observer, 갤러리 조선, 서울
Slow Tempo, JH Gallery, 서울
Edition: Pop-Up, 인터알리아, 서울
2010
Seven Senses-Flux, 갤러리 룩스, 서울
외 다수
소장
휴스톤 미술관(미국)
Museet for Fotokunst(덴마크)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대림미술관
신라 호텔
신세계백화점(본점, 죽전점)
개인소장 다수

photo, minimal
김도균, 박남사, 이주형, 황규태
미니멀한 사진이란 무엇인가
문혜진(미술비평)
대략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누구나 알지만 정작 그 실체가 무엇이냐를 물으면 명확히 답하기 곤란한 개념들이 있다. 외형적 유사성은 존재하나 기원이 불분명하고 하나의 사조나 흐름으로 묶기에는 공통점이 없을 때, 보통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 미니멀 사진이라는 용어 또한 그러하다. 흔히 모더니즘 건축의 기하학적 파사드나 대상의 일부를 추상적으로 찍은 사진을 지칭하는 이 용어는 ‘미니멀’하다는 용어의 다의성이 ‘사진’이라는 특수한 매체와 결합하면서 그 모호성을 더하는 듯하다. 우선 미니멀이라는 의미부터 살펴보자. 어원적으로 미니멀은 최소화라는 뜻을 함축한다. 그런 고로 미니멀하다는 표현의 표면적 의미는 재료나 형태, 구성에서 단순화와 최소화를 추구한다는 뜻이고, 그것이 단위 요소의 반복, 몬드리안식 대칭과 리듬, 기하학적 미, 추상성과 규칙성, 직선적이고 명료함 등의 외형으로 표출되며, 나아가 이와 같은 형식적 요소를 배태한 맥락(현대성, 모더니즘적 합리주의, 이상주의)과도 연계되는 확장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은 미술에서 하나의 사조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미니멀리즘’의 존재다. 도널드 저드(Donald Judd)와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의 주도 하에 1960년대 중후반 태동한 미니멀리즘은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한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미국식 모더니즘의 계승이자 전복으로 태동했다. 아방가르드를 키치와 구분하기 위해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했던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은 미술적이지 않은 요소를 미술에서 제거하는 부정의 방법론으로 귀결되었고, 이는 캔버스 위에 발린 물감으로 상징되는 이야기와 형상이 제거된 추상 색면 회화로 형상화된다. 하지만 재현을 일으키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그린버그의 엄격한 청교도적 방식은 모노크롬 평면이라는 종착점 이후 나아갈 길을 잃게 된다. 저드가 “특수한 사물(Specific Objects)”이라는 회화도 조각도 아닌 제3의 개념을 제시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다. 실제 공간인 3차원의 사물은 환영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반(反)환영주의라는 모더니즘의 기치를 계승하면서도 회화의 사각 틀을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작가의 주관적 개입을 배제하고 구성의 위계를 없애려는 미니멀리스트들의 의도는 최대한 단일한 형태와 중심이 없는 병치(one after another) 구조라는 미니멀리즘의 외형적 형태를 낳는다. 단순한 큐브가 줄줄이 나열된 저드의 작업은 미술에서 형태적·은유적 환영을 제거하기 위한 이론적이고 논리적 사유의 결과였으므로, 보통 단순히 기하학적인 외형과 결부되는 미니멀이라는 말의 통상적 사용과는 실상 상당한 거리가 있는 셈이다.
이처럼, 가깝게는 단순성, 규칙성, 추상성, 반복 같은 외형적 특징에서부터 멀게는 사물성, 연극성, 현존성 같은 이론적 개념까지 확장되는 미니멀이라는 단어는 사진과 결부되면서 어떤 효과를 낳는가. 사진의 범주 또한 무한히 넓으니 어떤 사진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photo, minimal»(갤러리 룩스, 서울, 2018)에 참여하는 김도균, 박남사, 이주형, 황규태의 경우 미니멀은 표면적으로는 추상이요 태도에 있어서는 보이는 것 너머의 어떤 근원을 추구함을 의미하는 듯하다. 여기서 미니멀은 대상을 재현한다는 사진의 본래적 목적을 넘어선 탐색을 뜻한다. 모든 사진은 원론적으로는 구상이다. 대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취하는(taking)’ 사진의 본성상 사진에 찍힌 모든 대상은 실재하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그렇기에 사진으로 비재현을 추구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모순을 동반한다. “모노크롬 사진은 현실의 추상이며, 실재와 추상이라는 모순되는 두 항이 혼재하는 역설의 이미지”1)라는 박남사의 말처럼, 재현 너머를 추구하는 사진은 구상이면서 동시에 추상이기에 자신의 기원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 초월의 의지이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사진의 경계를 넓히는 매체 탐구가 된다. 이들 사진가들은 모두 카메라라는 장치를 통해 육안으로는 불가능한 추상적 이미지를 도출해낸다. 때로는 점, 선, 면이라는 기본적 조형 요소의 구성미를 탐색하기도 하고, 재현과 비재현, 표면과 깊이의 공존을 탐구하기도 하며, 시각성을 넘어 촉각적이고 물질적인 경험을 유발하거나, 아예 21세기 이미지의 기원인 픽셀의 세계로 빠져들기도 한다. 이때 비재현적인 어떤 속성을 도출하는데 카메라와 사진이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가 각 사진가의 작업을 해석하는 핵심이요 «photo, minimal»에서 ‘미니멀한 사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 이주형의 사진은 참여 작가 중 구상이라는 사진의 본성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작업일 테다. 가림막 혹은 블라인드의 일부를 확대해서 찍은 그의 사진은 적당한 정도의 클로즈업으로 인해 대상의 형태가 유지되며 피사체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는 세부(가림막을 올리고 내리는 볼 체인, 창문 틀)가 포함되어 있어 보는 자로 하여금 이미지의 출처를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의 사진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진가가 가림막을 가림막으로 찍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주형이 실체로서 가림막을 재현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진의 지향은 블라인드의 표면인가, 흐릿하게 드러나는 그 너머의 풍경인가, 그도 아니면 블라인드 너머로 스며 나오는 빛인가.2) 초기의 사진이 바깥 풍경으로 대변되는 구상과 격자로 대변되는 추상을 비슷한 비중으로 공존시켰다면, 이번 전시에 출품된 근작들은 외부 풍경을 최소화하고 창틀과 블라인드가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리듬과 그 사이를 침투하는 빛의 자국에 집중한다. 일차적으로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화면을 분할한 격자 구성이다. 좌우 대칭을 이루는 크고 작은 직사각형들이 만들어내는 분할의 리듬은 몬드리안 식의 화면 구성의 묘를 창출한다. 이를 위해 사진가는 화면의 프레이밍, 빛의 점진적 차이에 따른 명암을 섬세하게 조율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격자가 질서와 반재현, 체계를 상징하는 모더니즘의 “침묵에의 의지(will to silence)”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적이고 초월적인 의미를 열어젖히는 것이 이 사진들의 독특함이다. 이주형이 찍는 것은 “카메라라는 기계의 힘을 빌어서 생체 감각의 차원으로 침투시키는 빛의 이미지”3)다. 이주형의 격자들은 기하추상의 차가움이 아니라 마크 로스코(Mark Rothko)나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의 그림처럼 떨리는 빛의 진동을 전달한다. 창틀의 윤곽을 따라 떠오르는 초록색 십자가의 형상이나 투과되는 빛의 광량에 따라 짙어지는 노란색의 계조는 마음을 가라앉힌 평정의 상태에 도달할 때 얻을 수 있는 고요함과 명상의 느낌을 불러온다. 실제로 작가는 촬영 당시 자신을 고양시킨 신체적 감각과 현존을 일깨우는 광휘를 관객에게 전달하기를 의도한다.4) 공간에 둘러싸여 신체적으로 느낀 감각을 사진이라는 평면적이고 시각적인 매체로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디지털 작업을 통해 명암과 선예도, 채도를 강조한다. “디지털 변용을 통해 증폭된 빛의 질감”(작가)은 시각을 매개로 한 공감각적 환영을 일으킨다. 여기서 사진은 빛의 감각이 관객의 몸을 관통해 스며드는 촉각적이고 현상학적 체험으로 인도하는 초월적인 매체가 된다.
- 한편, 박남사의 사진은 외견상 출처를 알아챌 수 없는 파란색 모노크롬 이미지다. 각각 ‹뉴욕›(2018), ‹서울›(2018), ‹평양›(2018)이라는 제목을 지닌 이 사진들은 구름이 거의 없는 맑은 날 하늘을 촬영한 사진이다. 촬영 대상이 ‘하늘’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단서는 제목뿐이지만, 그것도 이미지의 정체를 고정시키기엔 불충분하다. 형상이 전무하기에 하늘을 찍은 것인지 파란색 플라스틱을 찍은 것인지 아니면 모니터를 찍은 것인지 보는 이는 알 수가 없다. 결국 관객은 한편으론 푸른색 모노크롬 이미지 자체의 계조 변화를 감상하고, 다른 한편 캡션을 보며 사진의 대상을 유추하는 분열된 감상을 하게 된다. 여기서 관객을 교란시키는 작가의 모노크롬 하늘 사진은 개인전 «뉴 모노크롬: 회화에서 사진으로»(갤러리 룩스, 서울, 2017)가 표방한 문제의식의 연장이다. 여기서 작가는 보통 초월이나 숭고와 연관되는 모노크롬 회화의 지위에 대한 도전으로 사진적 모노크롬을 감행했다. 앞서 말했듯 언제나 구체적인 대상(물질)을 떠날 수 없는 사진의 존재론적 특징은 정신성을 상징하는 고급미술과 대비되는 저급예술(중간예술)의 증거로 간주되곤 한다. 박남사는 통속예술이라는 사진의 근원을 온전히 수용할 뿐 아니라 역으로 이를 이용해 모노크롬 회화의 위선과 한계를 폭로한다. (물감의 물성을 무시하면) 겉보기에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검은 사각형(Black Square)›(1913)과 다를 바 없는 ‹검은 사각형의 비밀›(2017)은 실상 스마트폰의 검정 화면을 그대로 찍은 것이다. ‘절대 정신’이라는 예술의 목표가 사물이 없는 “비대상적 세계(non-objective world)”를 의미하던 말레비치와 달리, 박남사의 모노크롬 사진은 철저히 사물의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다. 박평종이 지적하듯, 박남사의 모노크롬 사진은 모노크롬이 ‘저 너머’ 초월적 세계뿐 아니라 ‘저 아래’의 세속적이고 평범한 세계에서도 나올 수 있음을 주장한다.5) 이는 마치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비천한 유물론(base materialism)’의 사진적 재해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 역시 하늘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대상으로 모노크롬을 구현한 것이다. 여기서 미니멀이라는 감각을 유발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모노크롬 이미지요 이차적으로는 비슷한 이미지의 반복이다. 미니멀리즘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인 반복의 연쇄가 사진에서 다르게 작동하는 지점은 흥미롭다. 구성적 위계를 제거하고 작가의 주관적 개입을 배제하려는 형식적 필요에서 도출된 반복이 여기서는 ‘헛된’ 행위를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전 세계를 떠돌며 동일한 하늘을 사진 찍는 행위의 무용함은 ‘어리석은’ 모노크롬의 시작으로 간주된다.6) 이러한 사진의 무의미가 실제와 다른 캡션에도 반영되어 있음은 작가의 짓궂은 농담이겠다. 뉴욕, 서울, 평양이라는 제목과 달리 세 작업은 모두 재직 중이던 학교의 교정에서 촬영한 것이다. 정치적 의미를 자동으로 부여하게 되는 제목의 의미를 실제가 배반하는 상황은 ‘헛수고’라는 개념의 적용이기도 하고 텍스트가 이미지를 규정하는 해석의 일방성을 방지하는 방책이기도 하다.
- 이주형과 박남사가 구상인 동시에 추상인 사진의 즉물성을 유지했다면, 김도균의 모노크롬은 디지털 추출을 통해 훨씬 추상화된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 ‹still life›(2018)는 2018년 1월 1일부터 2018년 12월 31일(예정)까지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사진 365점의 프린트를 격자 형태로 일괄 배치한 작업이다.7) 이 작업은 작년 개인전 «instagram@kdkkdk»(상업화랑, 서울, 2017)의 연장이자 응용으로 볼 수 있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2011년부터 2017년까지 2456일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1555점의 사진을 폴라로이드 형태로 출력해 전시장 벽면 가득 붙였다. 인스타그램이라는 공유 방식, 일기에 가까운 일상의 기록, 개개가 아니라 복수의 사진 제시, 격자 형식의 배치는 이번 출품작에 그대로 이어진다. ‹still life›는 촬영 대상을 ‘정물’로 한정해 ‘매일’ 해당 일을 기억할 수 있는 사물을 촬영 후, 해당 사진에서 ‘한 가지’ 색을 추출해 하나의 픽셀로 기록한 작업이다. 이때 색 선택 기준은 전체 이미지에서 지배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색이다. 이는 물리적인 분량을 의미할 수도 있고 내용적 장악력을 가리킬 수도 있다. 색을 추출하는 도구는 팬톤 스튜디오 앱(PANTONE Studio App)이다. 추출한 색을 이미지로 사진 앱에 저장하고, 팬톤의 색번호, 원본 사진의 날짜, 찍은 사물을 캡션(예. 116XGC_20180417_민들레)으로 기록 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 한다.8) 경우에 따라서는 원본 사물의 이미지와 색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으나(민들레-노란색), 캡션만으로는 해당 색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도저히 추정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오른손-갈색). 색의 출처는 색면 사진 프린트 뒷면에 수기로 기록될 뿐 구매자 외에는 원본 사진이 공개되지 않으므로 관객은 색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 길이 없다. 결과적으로 작업은 박남사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모노크롬을 전복한다. 표면적으로는 엄격하고 절제된 기하추상의 색면 격자로 보이는 이미지들은 실상 지극히 범속하고 일상적인 스마트폰 사진에서 유래한 것이다. 김도균의 작업은 박남사처럼 이론적이거나 이념적 선언이 아니며 가볍고 경쾌한 유희적 태도의 소산이지만, 이로 인해 내용과 형식의 괴리는 더 벌어진다. 그의 사진은 엄숙한 기하추상의 미니멀을 문자 그대로 ‘가지고 노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사체의 선정, 촬영 방식, 제작 태도의 모든 측면에서 ‹still life›는 모더니즘의 구도(求道)적 탐색에서 이탈한다.
이때 최종 설치물인 색면 격자의 색 배치를 작가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은 기존작과의 중요한 차이다. 건물의 파사드를 낮에 촬영한 초기 대표작 ‹f›(2002-)나 실내 공간의 일부를 찍은 백색 연작 ‹w›(2007-), 나아가 일상적 포장재를 근접 촬영해 또 다른 기하 추상을 도출한 ‹p›(2015-) 연작에서 드러나듯, 김도균은 언제나 대상의 조형성에 관심이 있었으며 점, 선, 면의 기본 요소들이 경쾌하게 조합되는 표면처럼 피사체에 접근해왔다. 여기서 화면의 조형성은 정교하게 선택한 시점과 프레이밍, 접사에 의해 세심하게 구성되고, 공들인 촬영과 보정, 인화로 완성된다. 반면 ‹still life›의 구성은 원론적으로 작가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전날의 색을 고려해 오늘의 색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그날의 이미지에 충실해 즉흥적으로 색을 선택하기 때문에 각 이미지는 앞뒤의 이미지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순차적으로 배치하므로 더더욱 이미지 구성에서 작가의 개입은 배제된다. 촬영과 색 선택은 작가가 하더라도 색 추출은 팬톤이라는 앱이 기계적으로 수행하고, 그렇게 추출한 색은 어디서나 동일한 표준화된 색상 값이다.9) 색면의 배치 또한 날짜순으로 기계적으로 할당하니, 이 작업이야말로 사진적 레디메이드의 동시대적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디 사진이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었으니 디지털 프로그램이 가세하며 자동화가 심화된 사진적 장치들은 갈수록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되는 동시대 이미지의 초상일지도 모른다.
- 황규태의 픽셀 사진은 사진 너머의 사진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실험이다. 사각과 원이라는 기본 조형 단위를 재료 삼아 색면의 조합으로 기하학적 리듬감을 만들어낸 이 추상 이미지가 실상 ‘촬영’이라는 사진의 본령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자아낸다. 작가는 1990년대 후반 우연히 브라운관 TV 모니터를 루페(확대경)로 들여다보고 픽셀의 세계를 발견한다. 대형카메라로 이 놀라운 발견을 촬영한 그는 이후 여러 기종의 온갖 모니터들 위의 다양한 이미지를 픽셀로 기록하기 시작한다. 제조사에 따라 선, 원, 사각형 등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는 픽셀의 모양과 표면 이미지의 색에 따라 다른 배합으로 구성되는 색면의 조합은 황규태에게 파고 파도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 입장한 듯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스스로 “컬러의 놀이”라고 칭하는 픽셀과의 유희는 사진의 관점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픽셀 작업이 육안으로 감지할 수 없는 렌즈의 시선에서 출발했고 그것을 카메라로 직접 촬영한 결과이므로 일차적으로 이 작업은 사진에 기반한다. 하지만 1차 이미지를 얻는 과정이 종료되면 작업은 포스트프로덕션의 세계로 진입한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포스트프로덕션이 단순 후보정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2차, 3차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생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픽셀은 반복해서 확대가 가능하다. 픽셀을 확대하면 다른 픽셀이 나오고, 그 픽셀을 확대하면 또 픽셀이 나온다. 프랙탈을 연상시키는 입자들의 무한 연쇄는 작가에게 우주를 탐험하는 듯한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pixel; 말레비치 이후 blue circle›(2018)이나 ‹pixel; 말레비치 이후 blue cross›(2018)처럼 완벽한 모노크롬이 아니라 다른 색점들이 노이즈처럼 섞여 들어간 이미지는 확대를 덜 한 버전이다. 여기에 반복적인 확대를 가하면 ‹pixel: cross and square›(2017)처럼 완전한 단색조 색면이 나타난다. 이미지의 생산이 실사 촬영이 아니라 기존 이미지의 확대라는 점에서 작업은 카메라와 촬영이라는 사진의 근간에서 벗어나지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취사선택’하는 작가의 행위는 여전히 사진가의 태도다.
하지만 픽셀 작업을 사진적으로 가장 첨예하게 만드는 것은 이 사진이 사진의 기원, 곧 이미지의 출발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작가 스스로 밝히듯, 그의 픽셀 작업은 디지털 시대의 말레비치에 대한 재해석이기도 하다. 형상을 제거함으로써 형태와 색채만의 순수한 구성에 도달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처럼, 구상 이미지를 확대하며 도달한 미니멀 추상 색면의 세계는 전자 이미지를 이루는 기본 입자들의 무한 공간이다.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사진은 감광입자 혹은 소자 개개가 빛에 반응한 결과이고, 오늘날 이미지의 다수를 이루는 전자 이미지는 픽셀들이 조합된 종합체다. 그런 점에서 황규태의 픽셀 사진은 사진을 구성하는 기본 물질을 ‘광학적 무의식’을 통해 발견하게 해주는 작업인 동시에, 현실을 넘어 초현실로 이행하는 비물질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원근법을 벗어난 말레비치의 그림이 물질성을 벗어버린 절대정신의 세계, 무한 시간 속의 무한 공간을 현시하듯10), 황규태의 픽셀도 실재라는 사진의 본성 너머의 추상의 세계를 소환한다. 확대에 확대를 거듭하면서 실재의 지표라는 현실과의 끈은 희미해지고 순수 추상의 조형적 탐색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황규태의 사진은 구상과 추상의 긴장 관계를 쥐고 있는 박남사의 사진과 궤를 달리하며, 색채 앱이라는 시각 장치를 통해 모노크롬에 도달한 김도균과 달리 확대라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전자적 미니멀의 극한에 도달한다. ‹pixel: evolution blue rose›(2018)는 그의 방법론의 요약과도 같은 작업이다. 장미꽃이 단색의 입자에 접근하면서 현실을 지시하는 사진의 기호는 어느 순간 실재의 굴레를 벗은 순수 기표로 이행한다.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느 범위를 넘으면 사진이 아니라고 할까. 사진은 사진이어야만 되는 것일까.”11) 어쩌면 황규태의 질문은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모두의 작업에 적용되는 핵심 논제일 것이다. 사진이면서 사진이 아닌 것, 사진 이후의 사진, 사진을 뛰어넘은 무언가는 사진의 전통에 발을 디디고 있되 21세기의 시각 환경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진가들 공통의 화두다. 실재를 내포하면서도 보이는 것 너머로 나아가는 미니멀 사진의 탐색은 그런 점에서 사진의 경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이 굳이 카메라를 경유할 필요가 없음에도 카메라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은 생각해 볼만한 지점이다. 구상 이미지의 흔적을 남겨두고 있는 이주형을 제외한 세 작가들의 사진은 외견상 비(非)촬영 이미지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특히 기계적으로 할당된 표준적인 색상 값을 출력한 김도균이나 스크린을 계속 확대해 픽셀을 뽑아낸 황규태의 사진은 기존 인터넷 이미지나 스캔한 이미지로도 충분히 제작 가능하다. 황규태의 경우 스캐너로 스캔한 이미지도 이미 작업에 활용하고 있으니 ‘카메라로 직접 촬영한 이미지’라는 사진의 전제에서 자유로워진지 오래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카메라라는 시발점을 벗어나지 않으려하는 것은 개념의 측면도 있겠지만 사진 매체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사진이 아닌 ‘이미지’를 이들 사진가들이 어떻게 수용하고 체화하는지가 향후 사진의 미래가 아닐까.
1) 박남사 작가 노트, 『뉴 모노크롬: 회화에서 사진으로』, 갤러리 룩스, 2017.
2) 손영실, 「이주형 Light Flow」, 『월간미술』, 2016년 10월호, 172쪽.
3) 이주형 작가의 말. (윤규홍, 「집 안에 갇힌 남자」, 『Light Flow』, 갤러리 분도, 2016 재인용)
4) 이주형 작가 노트, 2016.
5) 박평종, 「세속의 세계로 내려온 모노크롬 사진」, 『뉴 모노크롬: 회화에서 사진으로』, 갤러리 룩스, 2017.
6) 박남사 작가 노트, 2018.
7) «photo, minimal»이 시작되는 12월 7일부터 매일 새로운 사진이 한 장 씩 추가되어 전시되며, 12월 31일 365점의 사진으로 ‹still life›는 완결된다.
8) 김도균 작가 노트, 2018.
9) 해당 색 번호를 인쇄하면 누구나 똑같은 색상의 프린트를 얻을 수 있다.
10) 윤난지, 『추상미술과 유토피아』, 한길아트, 2011, 161쪽.
11) 황규태, 『황규태』, 열화당, 2005, 18쪽.

Code : Black Bay
송민규
적당과 적절
최윤혜(미술사가)
송민규는 그간 진행해왔던 ‘오늘날 새로운 시각기호’에 대한 탐구를 2016년부터 최근까지 기획한 3개의 전시 드로잉 3부작>을 통해 보여주었다. 기호화 작업과 반복, 중첩 등을 통한 다양한 이야기 전개 기술은 그의 일상 생활에서의 경험과 SF영화 장면들에서 사용된 그래픽 이미지들에 기반한다. 작가 스스로 전시 3부작의 번외편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번 전시 에서는 이전 전시들에서 조명하지 않았던, 혹은 그 이후 진행된 작업들을 선보이게 된다.
적당한 어둠
그는 이전 전시 <낮보다 환한>(스페이스 캔, 2017)에서 어둠을 그린 적이 있다. 이때의 어둠은 그가 경기창작센터에서 있을 때 관찰했던 밤의 풍경으로, 인천공항 그리고 서해안 만과 인접해 있는 대부도에서 빛을 궤적과 시간의 중첩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함께 그가 겪은 2017년 한국 사회에서의 어두움의 경험은 대부도에서의 밤의 풍경과 함께 완벽한 어둠의 색(Black 100, Cyan 20, Magenta 20)으로 치환되었다.
전시 3부작을 마친 작가는 그 이후, 밤하늘의 밝은 달과 함께 어둠 안에 묻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기 위한 ‘적당한 어둠’에 집중했다.
이번 전시제목 에서 Black Bay는 달이 있는 어둠을 그리기 위해 선택한 아크릴 페인트 색으로, 전시에 선보이는 대부 분의 작업에 사용되었다. 밤하늘의 완벽하지 않은 검정색(Black 85-95%)과 약간의 푸른색(Cyan 15-20%)을 먼셀 색상기호로 치환하여, DUNN-EDWARDS 페인트사의 제품에서 근접 색상인 코드명 Black Bay(4.09PB/3.0/0.6)를 찾아 냈다. 작가는 공교롭게도 밤의 풍경을 그리게 된 대부도가 경기 만(Bay)에 속해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곳은 서울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군사경계지역, 공업지대, 인천항, 그리고 자연적으로는 많은 섬, 갯벌 등을 포함하는 곳으로 과거부터 지금까지도 드러나지 않은 어둠이 많은 곳 중 하나이다. 완벽주의적 성격을 가진 작가가 완벽한 어둠의 색(Super Black) 대신 적당한 어둠을 선택한 이유는 가시계(可視界)와 함께 가지계(可知界)의 보기 위한 작가의 사회적 태도라 할 수 있다. 개인적 조형언어로 치환하고, 반복하고, 중첩했던 이전 작업들과 비교하여, 이번 작업들은 간결하고, 정치적이면서 낭만적이 다. (들려주지 않고) 이야기 하기 위한 혹은 (보여주지 않고) 보여주기 위한 공간으로의 애매하고 적당한 어둠의 장막이 그 이유이다. 작가의 채색적 테크닉에 기반하여 작업은 여백없이 매트하다. 두터운 이 장치들의 메시지가 때로는 강하기도 하고,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 초의 불빛은 이제까지 깊은 어둠에 잠겨 있던 침대 기둥 옆의 움푹 들어간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이제 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림 한 점을 환한 불빛 속에서 보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 막 여인으로 성숙해 사는 한 소녀의 초상화였 다. 나는 한참 이 그림을 바라본 뒤 서둘러 눈을 감았다. 왜 그랬 는지 처음에는 나 자신이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있는 동안, 그렇게 급히 눈감았던 이유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것은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내가 본 것이 정말인지 확신하기 위해, 내 상상을 억누르고 진정시켜 좀더 냉정하고 확실하게 그림을 보기 위한 순간적인 행동 이었다.” (에드거 앨런 포「 타원형 초상화」중)
적절한 조형
「펼쳐진 달」,「 13개의 달」에는 정형화되지 않은 노란 원형의 물체가 단독으로 혹은 다른 패턴화된 이미지와 함께 나열되어 있다. 대상을 둘러싼 모든 맥락은 Black Bay가 덮고 있는 듯 보이고, 작가의 이전 경험치는 우리에게 반복되는 이 이미지들을 (어쩌면 대부도의) 달로 연상하게 한다. 또한 「회색개론 1-28」에서는 3가지 톤의 회색면과 선으로 작가가 살아왔던 기억 속 도시의 모퉁이 풍경을 보여준다. 반복되는 새로운 조형의 발화는 작가의 적절한 조형적 선택이다. 송민규는 언어, 결합, 온도, 색감 등의 다양한 변주를 통해 우리의 감각을 기분 좋게 예민하게 한다. 이는 절제되어 있으면서 강렬하고, 정제되어 있으면서 리듬적이며, 키치하면서도 날카롭기 때문이다.
「 13개의 달」에서 적절한 노랑 덩어리는 13번째 반복된다. 그는 1년 즉 12개월을 보내고 다음 한해의 첫 달을 의미하는 13번째 달의 조형적 연습을 통해, 전시 3부작이 끝남과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이 있음을 알리는 시그널을 보낸다.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Black Bay의 적당한 어둠에 숨겨진 것들과 13번째 달의 시그널을 기대한다.

Subscale
정희민, 추미림, 허연화
기획의 글
박은혜(갤러리룩스 큐레이터)
우리는 신체의 오감과 기술의 성질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해왔다. 특히 기술은 우리의 생활 전반을 편리하게 해주었고, 우리가 무심코 상상하던 일들을 실현시켜주었다. 20세기 초반 무렵 발명된 비행기로 우리는 지구 곳곳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우주여행을 꿈 꾸게 했다. 1969년 7월, 엄청난 인력과 자본을 투입한 끝에 아폴로 11호는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다.
오늘날 세계는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서 손으로 지각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 태블릿 PC, 스마트폰의 사용자(user)로서, 디지털, 온라인, 스크린으로 세계를 손질하며 탐구해나가고 있다. 우리는 ‘정체성’이라는 삶의 차원에서 간단한 클릭과 터치로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는 굉장히 작고 좁지만, 그렇기에 가장 크고 넓다. 당신의 하루 일과를 생각해보자.
Subscale을 구글링하면, ‘부척도’라는 다소 생소한 단어를 안내 받는다. ‘금속 표면 하단에 일어나는 산화반응’. 공학에서 사용되는 용어이지만, sub와 scale의 합성어로 이해한다면, ‘대신하는 규모’로서 계속해서 규격이 변형될 가능성을 지닌 무엇을 가리킨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세계가 비물리적으로 시각화되는 움직임과 닮아있다. 설정된 기본 값(deafault values)은 사용자가 처한 시공간의 조건과 개별적이면서 복수적인 선택의 상황에서 무용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본 값이라는 가정은 반드시 존재하지만 쉽게 상실될 수도 있다. 이는 근대적 시각 체계인 ‘선형 원근법’의 해체로서 간단명료하게 설명될 수 있겠지만, 충분해 보이진 않는다.
이번 전시에서 정희민, 추미림, 허연화는 각자의 분석적이고 유희적인 알고리즘으로 생성/수정되는 디지털 이미지를 어떠한 상태로 구현할까 고민했다. 기본 값으로 설정된 갤러리 룩스에서 각자가 시각화했던 디지털의 면면을 불러오는 과정에서 작품의 규모와 매체가 선택되었다. 작품이 제작되는 각각의 단계를 살펴보는 것은 꽤나 유용하겠지만, 이는 간편하고 확정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몇 가지 단서를 남겨놓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하며, 계속해서 변형될 가능성을 지닌 단서(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선택과 틀(frame). 색면으로 평면화되는 공간. 무한한 확대. 남겨지는 가벼운 픽셀. 작고 귀여운 드로잉. 납작한 선. 솟아오르는 면. 양감을 찢는 윤곽선의 이질감. 이와 같은 단서(들)은 다시금 오늘날 우리 세계가 재구성되는 움직임으로 되돌아갈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회화적이고, 조각적이고, 사진적인 가능성의 차원에서 오늘날 우리 미술에서의 디지털 감각을 상상하게 할 것이다.

광光
조습 Joseub
조습
Joseub (b.1975)
개인전
1999
경원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성남
2001
경원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성남
개인전
2018
광光, 갤러리 룩스, 서울
2016
네이션, 인디프레스, 서울
2014
어부들, 갤러리 조선, 서울
2013
일식, 박수근 미술관, 양구
기획전
2017
포스트모던 리얼, 서울대학교 미술관, 서울
2017이 1987에게,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서울
횃불에서 촛불로,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삼라만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도시 · 도시인, 북서울미술관, 서울
2016
행복의 나라, 북서울 미술관, 서울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효 · 어 · 예, 전북도립미술관, 완주
경기잡가, 경기도미술관, 안산
제3지대, 가나인사아트센터, 서울
2015
서울사진축제 ‘위대한 여정’, 북서울 미술관, 서울
터와 길, 제주종합문화예술센터, 제주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제14회 동강국제사진제, 동강사진박물관, 영월
얼음의 투명한 눈물,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경기도미술관, 안산
대구미술관, 대구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수원
부산현대미술관, 부산
우민아트센터, 청주
박수근 미술관, 양구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후쿠오카, 일본
수상경력
2017
제16회 우민 미술상 – 우민재단
2005
제13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 문화관광체육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