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년기를 인적을 찾아보기 힘든 서울의 변두리에서 보냈다. 집 근처에는 작은 헌책방이 있었다. 나는 주로 그곳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열두 살의 여름방학에 아버지는 헌책방에서 사 온 책들로 집의 지하실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주었다. 그 지하실은 작은 세계 같았다. 완벽하고 독립적이고 투명한 작은 세계. 그곳에서 나는 책 속의 모든 언어가 합쳐진 하나의 단어를 상상하곤 했다.
여름방학이 끝나던 날에 폭우가 내렸다. 보름달의 달무리가 불안한 암호처럼 푸른빛 동그라미를 그리던 밤이었다. 비는 나흘간 쏟아졌고, 한강의 둑이 넘치며 홍수가 일어났다. 학교는 며칠간 휴교되었고, 나는 지하실에 빗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어깨를 웅크린 채, 얇고 거대한 한 꺼풀의 세계가 어둠 속에 삼켜지고 있다고 느꼈다. 지하실의 물이 다 빠지자 나는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책의 안쪽에서 고요히 새어 나오는 먹색 어둠들, 겹겹이 쌓여 있는 수백 장의 종이들, 문장이 물고기처럼 토막 나서 비늘 같은 조사와 어미들이 떨어져 나와 나의 눈 속에 박혔다. 최대한 책을 건져 냈지만 문장의 세부를 읽지 못했다. 형상과 단어들은 덩어리로 뭉개져 있었고 읽기는 오직 상상의 힘으로만 가능했다.
나의 여름방학은 어둠이 흥건한 나무 냄새와 곰팡이 냄새 물비린내로 범벅이 되어 있다. 서늘하게 젖은 공기, 흥건히 젖은 어둠, 나무의 수액 냄새가 진하게 번져 있는 캄캄한 잡풀 속에서 밤새우는 풀벌레들. 이 이미지들 속에서 내 유년은 금이 가며 흩어졌다가 가까스로 모아지며 흘러갔다. 그토록 찬란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그 후에는 경험하지 못했다.
어두운 배경의 도로가 있다. 그러한 배경 이미지 위로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놓칠세라, 또는 촬영자가 현장에서 사진을 통해 바라보던 당시의 시간의 총량을 기록하듯 빛의 궤적이 수를 놓으며 흐르고 있다. 그리고 주어진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이미지의 구성상 중심을 이루는 어떤 이미지가 배경의 전경을 장식하며 흐릿하게 중첩되어 있다. 조준용의 사진은 일반적으로 공통된 하나의 배경 – 도로와 하나의 유형으로 분류되는 이미지가 중첩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작가의 사진에서 사각 프레임 안에 담기는 이미지의 형식적 구조는 작가의 과거작에서도 유사한 형태를 띤다. 예를 들면 2015년의 개인전 (아마도예술공간, 2015)는 빛의 흐름이 수놓은 도로를 배경으로 아버지의 수첩에서 발췌한 이미지를 오버랩하여 하나의 풍경 사진으로 담아내었다.
이러한 이미지의 구성 안에서 첫째로 주목해볼 만한 것은 배경의 전면으로 유령처럼 반투명하게 떠 있는 이미지 (위에서 언급한 이미지의 구성상 중심을 이루는 흐릿한 이미지) 로부터 볼 수 있는 작가가 취하는 시선/ 심리적 거리이다. ‘Memory of South, 416km‘ 연작에서는 일반적인 풍경 사진과는 사뭇 다른, 마치 누군가의 오래된 기억을 들춰보는 듯한 분위기의 이국적인 풍경과 군인의 이미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 이미지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작가의 아버지가 직접 찍은 사진과 당시 다른 이가 찍은 사진이 담긴 실재 앨범에서 발췌한 것으로, 특정 시대를 대변하거나 역사책의 한 챕터를 장식해야 할 듯하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지의 구성에서 배경이 되는 고속도로, 그중에서도 한국의 경제성장의 스토리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경부고속도로와 맞물리며 한국의 근대사와 독재정권, 국가개발정책이라는 거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조준용의 시선이 취하고 있는 거리의 문제이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주요한 사건과 장소를 주요 이미지로 다루며, 그것을 하나의 평면 위에 새롭게 재구성하여 사용하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조금은 더 개인적인 경험과 그로부터 형성된 사유의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한국의 근대사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특정 사건과 역사를 읽기보다는 타인에 의해 옮겨진 미시적 기록에 기대어 그것을 소비하는 주체로서의 시선이다. 그의 사진가적 시선과 앵글에 의해 다시 사각의 프레임으로 옮겨진 기존의 사진 이미지는 근대사의 크고 작은 주요 사건, 사고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보편적 책임감이나 윤리의식, 깊은 문제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거대 맥락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심리적 거리를 유지한 채 렌즈를 통해 외부의 현상과 풍경을 관조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가 다루고 있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기록된 풍경은 적절한 시선의 거리를 담보하며 시공을 초월한 풍경이 된다.
작가적 시선의 거리를 조율하기 위한 통로로써 타자의 기록 –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최근의 연작 <4.9mb Seoulscape>(2017)에서도 이어진다. 전작과 동일한 이미지 구성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 이 연작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시대의 상흔을 간직한 장소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그가 직접 촬영한 사진이 아닌 특정 기관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 기록한 사진 모음에서 일부를 선별한 것이다. 조준용은 서울시가 온라인을 통해 제공하는 도시경관 기록화사업[1]의 일환으로 기록한 약 2만 5천 장의 사진 중 일부를 취사선택하여 사용한다. 이를테면 ‘삼풍백화점’, ‘동대문운동장’, ‘구 국립중앙박물관’과 같이 한국 근대사의 사회/ 정치/ 문화적 맥락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획득하는 장소에서부터 ‘아현동 재개발 구역’이나 ‘청계고가’, ‘청량리 홍등가’와 같이 도시재개발사업에 따라 소멸된(되어가는) 장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작가는 이러한 근현대사의 궤적에서 주요한 족적을 남겼던 서울의 장소와 지역이 온라인상에서 4.9mb의 용량의 디지털 이미지로 환원되어 글자 그대로 ‘전시’되는 방식에 주목한다.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과거에 고정되어버린 장소가 디지털 이미지로 저장되어 특정 목적 안에서만 기능하게 되는 방식. 한국 근현대사의 맥락 안에서 다층적으로 엮이며 끊임없이 특정한 의미를 산출하던 장소가 저용량의 이미지로 환원되어 특정한 텍스트와 기호로만 존재하게 되는 상황에 주목하는 것이다. 최근작을 중심으로 보자면, 과거 타인의 기록에 기대어 관조하던 작가의 시선은 한 발짝 더 나아가 외부의 풍경과 심리적 거리를 좁혀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1990년대 당시 미성년자였기에 주체적 개인으로 시대의 흐름을 이끌 수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접 보고 느꼈던 시간의 축을 공유하는 대상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상에 대한 심리적 거리의 변화는 관조의 시선에서 작가 스스로 뒤처져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유예하기 위한 능동적 제스처로 바꿔놓게 된다.
조준용의 작업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요소는 ‘도로’이다. 그의 사진에서 일관되게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도로이며, 의미의 바탕으로서 앞서 언급한 중심의 이미지와 끊임없이 연동하는 것이 바로 이 도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어두운 배경으로 전면의 이미지를 매혹적인 빛의 율동과 함께 담아내기 위한 배경이 아니다. 오히려 작품을 관통하는 전면의 이미지의 의미를 뒷받침하는 개념적 바탕이자 과거의 이미지를 현실의 차원에서 묶어내는 중첩된 시공의 무대로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오제(Marc Augé, 1995)는 과거와 분리되어 항상 현재만이 존재하는 공간을 ‘비장소(non-place)’라고 개념화하였다. 개개인의 경험에 의해 매개되는 인류학적 장소(anthropological place)와는 대비되는 개념인 이 ‘비장소’는 텍스트나 이미지에 의한 매개가 중심이 되는 곳이다. 또한, 인간에 의한 직접 경험 없이 단어나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어 경험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여기에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기억이나 경험, 역사가 축적되지 않는다. 조준용의 작업에서 도로는 현재성이 지배하는 익명의 공간이며, 빛이 수놓은 궤적이 암시하듯 고정되지 않고 유동하는 시공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이미지와 텍스트로 매개되는 비장소의 관점에서 조준용 작업의 배경 – 도로를 보자면, 장소의 성격을 상실한 채 과거의 시점에 고정된 하나의 이미지로 환원되어버린 전경의 이미지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개념적 배경으로 기능함을 알 수 있다.
전경과 배경의 중첩, 과거의 장소와 현재의 장소라는 두 개의 시간 축의 충돌, 타인의 기록과 익명성의 공간을 하나의 사각 프레임 안에 위치시키는 것, 이러한 중첩의 풍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준용의 시선은 고유한 상징성과 정체성을 보유했던 장소가 그 장소성의 상실과 함께 특정 목적에 종속된 하나의 풍경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비판과 그 이미지를 소비하는 주체로서의 양가적 태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타인의 기록을 경유함으로써 시선의 거리를 확보한다. 작가는 이렇게 대상을 향한 시선과 심리의 거리를 조율함으로써 지난 시간에 대한 개인적 상념과 소멸해가는 과거에 대한 보편적 책임의식을 가로지르며, ‘지금, 여기’라는 우리의 현재적 시간의 좌표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시공을 압축하여 평면의 프레임 위 현재의 시간에 고정시킴으로써, 과거의 시간 위에 쌓아 올려진 현재, 과거의 역사로부터 유리될 수 없는 현재를 환기하고자 한다. 이렇게 시공의 추이를 쫓는 조준용의 시선은 소멸된 과거를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시선으로 보듬으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1] 도시경관 기록화사업은 도시의 빠른 발전 아래 변화하는 도시의 경관을 기록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향후 도시의 지속적인 도시경관 관리와 아름다운 경관형성을 위한 기초로 수행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으며, 서울시는 1995년 시책사업의 일환으로 전국에서 처음으로 이 사업을 시작하였다.
«EYE-OPENING»은 “세계에서 미술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라는 고민으로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텍스트를 읽거나 누군가의 설명으로서 이해되는 오늘의 미술에서 우리는 여전히 감동 받는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오늘의 미술에서는 더 이상 경이로운 시각 경험이 무의미한걸까?
언젠가 빙산(iceberg)의 진짜 색을 담았다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대개 일상에 접하는 얼음(ice-cube)은 공기와 함께 얼려져 무색에 가까울 만큼 투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압력이 가득한 상태에서 얼려지는 빙산은 아주 영롱한 파란 빛깔들로 보여진다. Blue, Cobalt, Lapis, Azure, Admiral, Sky, Carolina Blue, Baby Blue, Oxford Blue, Prussian Blue, Navy, Midnight Blue, Berry, Denim, Cornflower, Royal Blue, Cerulean, Sapphire, Teal, Ocean, Aegean, Spruce. 파란색 계열의 수많은 색채명(color name)으로 그 빛깔들을 완전히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투명하고 맑은 바다빛에서 심해 깊은 어두운 바다빛에 이르는 스펙트럼을 상상해야만 한다.
한편으로 단단하면서 연약한 빙산은 예측 할 수 없는 시간(성)을 은유한다. 빙산의 시작은 너무나 먼 과거에 위치한다. 그것의 형성 과정은 역사적인 시간에서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빙산은 지나온 시간 만큼이나 다가올 미래의 시간도 간직하고 있다. 영원할 것 같지만, 빙산도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바닷물로 되돌아갈 것이다.
오늘의 세계는 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이상함,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등과 같이 이분법에 ‘정박’하지 않는다. 빛은 어둠을 향해가고, 어둠은 빛을 잠식해간다. 아름다움에 이상함이 잠재되어 있고, 이상함 안에 아름다움이 은폐되어 있다. 아폴론의 디오니소스화, 디오니소스의 아폴론화와 같은 전복에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해 왔다. 이것은 새벽처럼 중간에 놓인 시간을 뜻하지 않는다.
구성연은 검은 화면에 설탕을 녹여 만든 황금빛 장신구를, 김은주는 흰 화면에 검은 연필로 바람과 꽃의 형상들을 새겨 넣는다. 구성연의 화려한 장신구들는 어둠 속에서 빛으로 점멸한다. 한편 김은주의 반짝이는 꽃잎들은 빛 속에서 어둠으로 점멸한다. 이렇게 ‘점멸하는 것(들)’은 어느 것보다 컴컴하면서 밝다. 단단하고 연약한 대상은 “어둠은 어둠만이 아닌 색깔들”(<모르는 사람 모르게>, 이제니)이 된다.
«EYE-OPENING»은 글자 그대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전시이며, 사전적 의미처럼 괄목할 만한 것들을 살펴본다. 환상처럼 쉽게 사라지고 마는 놀라움을 넘어서서 우리 삶에서 경이의 순간들을 지속시켜줄 것이다.
«유영하는 삶 Floating Life»은 ‘30대-여성-미술가’가 미술작업을 지속해가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미적 감각, 감수성, 삶의 태도와 습관들, 어쩌면 세계관까지 포함될 수 있다. 또한 이는 ‘미술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스스로의 고민, 타인의 기대 등으로 확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전시는 불완전한 세계를 미세한 떨림으로 가시화하는 ‘30대-여성-미술가’의 시선을 주목하고 있다. 촛대 위의 작은 불꽃은 바람결에 쉽사리 흔들리지만, 초의 심지가 사라질 때까지 작은 불꽃은 아주 분명하게 존재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전시는 사무엘 베케트가 예술가를 “다른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할 만큼 실패하는 존재”라고 언급했던 것을 따라가 본다. 베케트는 예술가의 작업이 무력감과 무지로부터 시작되며, 결과적으로 예술가는 쓸모 없는 어떤 것을 “탐험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완전한/완성된 무엇에서 미끄러질 때, 역설적으로 세계는 무너지지 않는다. 세계는 탐험을 통해 구축될 것이다. 장보윤과 함혜경은 불완전한 세계에 맹목적으로 진지해진다. 누군가는 그들의 태도를 차치하고서라도, 그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삶 속에서 불현듯 장보윤과 함혜경의 이미지와 텍스트가 떠오를 텐데, 아마도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탐험”하고자 한다.
장보윤은 그간 누군가 버린/잃어버린 사진-이미지를 쫓아 여행했다. 사진 속 주인공의 시공간을 추체험하면서 만났던 낯선 풍경과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가 한편의 느슨한 서사가 되었다. 여기서 장보윤은 성실한 청자이면서, 섬세한 화자였다. 줄곧 그녀의 작업이 사진 속 주인공의 삶을 확인하며 해명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실된 증명으로서의 사진’이라는 오래된 사진의 신화에 균열을 내고, ‘부재로서의 사진’으로 삶의 (불)가능성을 발견하게 한다고 믿었다. 또한 온전하지 않은 삶을 살며 과거를 헤매는 동시에 슬픔을 감내하고 미래를 향해갈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로한다는 다소 추상적인 감상을 덧붙이기도 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경주 작업을 마무리 짓는 <마운트 아날로그>(2016)를 통해 장보윤 작업 전반을 부유하는 특정한 태도, 모호한 감정을 추적하고자 한다. 경주에 대한 작업은 2008년 우연히 습득했던 누군가의 필름에서 출발했다. 그녀는 수많은 필름과 앨범 속 사진들을 모으면서 원인 모를 불편함도 있었지만, 타인의 과거를 상상할 수 있다는 데 열광했다. 양가적인 감정 사이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보윤은 혼자, 때로는 일행과 함께 경주를 찾았었다. 그녀의 여러 시도 끝에 완성된 <마운트 아날로그>(2016)는 사라져가고 있던 경주에 또 다른 흔적들을 포착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살았던 사람들의 실화를 추적한 모큐멘터리 영상과 르네 도말의 ‘오를 수 없는 산’을 경주 남산에 비유해 그곳을 향하는 여정이 담긴 영상이 만들어졌다. 유운성은 그녀가 르네 도말의 미완성 소설 속 인물들의 무모한 모험을 닮았다고 스스로 규정하는 일에서 ‘위험’을 감지했다. 또한 유지원은 구체적인 공간에서 현전을 붙잡는 시도에서 이미 ‘함정’이 발견되고, ‘예정된 실패’로 돌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썼다. 아마도 위험, 함정, 실패 등과 같은 단어로 <마운트 아날로그>가 설명되는 이유는 작업 내부의 “넘치는 빛” 때문인 것은 아닐까. 사실상 경주라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닌데, 너무나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장보윤의 작업에 “통상적인 수단”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것은 아닐까. 이번 전시에서
<마운트 아날로그>는 경주라는 장소의 흔적을 지우고, 경주가 아닌 모든 곳에서 묵묵히 삶을 버텨내는 것으로 제시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겨우 여행을 시작했을 뿐”이다.
함혜경은 자신의 일상에서 접하는 개인적인 대화에 흥미를 갖고 있다. 너무나 사소해서 잊혀지고 마는 개인적인 이야기와 감정일 수 있는데, 그녀는 그것들을 마음 속에 새기는 듯 하다. 한글로 텍스트를 쓰고, 이를 또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더 정확히 “결국 심연 깊숙이 가라 앉아 두 번 다시 꺼낼 수 없”는 목소리이다. 텍스트와 목소리는 아마추어 분위기로 편집된 영상-이미지에 얹혀지면서 의심 혹은 탐험할 수 있는 ‘틈’을 발생시킨다. 텍스트, 사운드, 영상-이미지는 누군가의 상황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방법 중 하나지만, 반대로 함혜경의 그것들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오히려 모호한 어떤 것으로 남겨둔다.
밤의 불빛은 아름다운 것만 밝히지 않는다. <터널 끝의 빛>(2017)은 도시 야경을 배경으로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길지 않은 독백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누군가는 “기회를 줄” 사람이기도, “내 인생이 변화하길 바랬던” 사람이기도, 화자가 “마음을 바친” 사람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삶의 도전과 실패 사이에는 언제나 “냉정한 누군가”가 있다. 무엇이 옳(았)고, 그렇지 않(았)던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면, 삶은 부분들로 조각이 나기 시작한다.
함혜경의 작업은 뒤죽박죽인 우리의 삶을 닮아 있는 것 같다. ‘You only live once’라고 외치지만, 사실상 ‘You only die once’라는 그림자를 피할 수 없다. ‘지금-현재’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와 미래가 없는 ‘지금-현재’란 없다. 어쩌면 부분으로 조각 난 삶의 일부분을 인정하고, 어떤 말이든 되뇌면서 우리의 삶의 조각(彫刻)을 재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서 너무 다른 양태의 조각. 조각의 전체를 감상하는 일이 쉽지 않듯, 우리의 삶 전체를 체감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나의 첫사랑>(2017)은 왜 첫사랑에 실패했는지 질문 하며 시작된다. 그러나 이 영상은 첫사랑에 대한 단상이나 독백이라기 보다는 화자가 지나온 과거를 반추하면서 자신이 몸소 겪었던 불행, 한계, 실패들에 대한 것이다. 화자는 “지나간 불행”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새로운 한계”를 넘어선 순간을 기억해본다. 그러나 “이유 없이” “애절하게” “헤매며” 과거로부터 선명해지는 기억에 마음이 아프다고 고백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아플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조각난 삶의 부분들 사이를 떠돌며, 때때로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적 공간]은 작가가 공간에서 느끼는 감성을 영상과 설치 작업으로 표현한다. 이전의 개인전 [제1의 관계]에서 작가 스스로 경험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옴니버스 형태의 설치 표현작업의 연장선이지만, 이번 전시 [시적 공간]은 보다 시간적인 요소를 사용하여 은유적으로 표현된다. 이는 공간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늘 그대로 일 것 같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공간을 마주할 때의 시간적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즉, 공간에 들어선 사람의 시간적 상황이 공간을 느끼는 감정의 전부로 대체되어, 물리적 공간 너머 공간에 대한 감정의 움직임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