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은 근거가 더 없이 빈약한 일상들에 의지하게 된다. 합리적이며 양식 있는 사람들이 물질적 이미지들을 허황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우리는 그러나 이런 허황된 것들의 전망을 추적할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사회를 소비사회로서 특징짓는 것은 사물이 기호 가치를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물은 사회적 논리나 욕망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기호로 나타난다. 오늘날 현실은 속도와 경쟁을 바탕으로 모든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일상의 대화는 상대방에 대한 관심에서 사물의 포장이나 가격을 묻는 것으로 변하였다. 모든 인간관계는 참기 어려울 정도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이를 벗어난 개인은 침묵하고 만다. 현대의 합리적 시스템은 개인을 수많은 평균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렇게 소비사회 전체가 무의식적으로 지나쳐 버리는 우리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삶의 감각을 되찾고 사물을 사물답게 느끼기 위해 예술이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낯선 시간, 낯선 공간속에서 피사체(사물)와 만나는 사진은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이미지의 여행을 하게 된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은 본래의 용도와 문맥에서 벗어나 비자발적인 기억들을 솟아나게 한다. 카메라의 섬광으로 무의식적 기억을 붙잡아 정지시키는 개인적 체험을 통해 사물은 기존의 연관성이 파괴되어 새로운 문맥으로 전이된다.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 빛에 의해 화석화된 사진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지점처럼 기이한 느낌 혹은 낯설음의 소외를 체험하게 한다. 이러한 우연적 만남은 잃었던 대상을 다시 만나는 것이며 우연에서 작용하는 강박 메커니즘에 따라 개인은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반복하게 된다.
우리의 삶은 언어로 바꿀 수 없는 정체모를 불안의 속성을 갖고 있다. 이런 불안 속 우리는 일상적 감각을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자신이 그것에 대해 확실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현실은 판단하거나 잴 수 없는 것이다. 개인에게는 누구나 현실 세계가 펼쳐져 있고, 나는 이쪽에서 너는 저쪽에서 각각의 세계 속에 존재 할 수 밖에 없다.
카메라의 기계적인 눈은 주체가 독단적으로 세계를 조직, 구성하려는 것을 단절, 분열시키며 억압된 것과의 갑작스런 만남을 도와준다. 내가 바라보는 사진 속 장면은 단순한 기록도 아니고, 허구도 아닌 사진만의 고유한 시간과 공간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오늘날 개인은 일상의 불안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무모할 지도 모른다. 분석적인 이성과 관계된 세계 속 현실의 대상은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사물들이 스스로 말을 거는 ‘무대’의 환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상상력이 보태져 우리 삶에 한 줄기 바람이 된다.
장유진, HOMEWEAR, 2011. 8. 3 – 8. 16
유년시절, 나는 숨바꼭질을 하다 외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의 부들부들한 살결과 야시시한 팬티위로 화려한 하늘색 꽃무늬가 은은하게 비춰진 곳, 그곳은 바로 숲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 손에서 키워졌다. ‘멋쟁이 할머니’라는 별명이 있으실 정도로 감각적이셨던 할머니는 집에서도 늘 화려한 홈웨어를 계절마다 구입하셔서 즐겨 입으셨다. 난 그 홈웨어를 유달리 좋아했다. 유년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외출 후 그 홈웨어들은 내 속옷마저 거뜬히 벗겨버리고 머리서부터 한번에 침입해 내 맨 살을 휘감는다. 그것은 편안함과 포근함을 주고 그 어떠한 것보다 위안을 준다.
28살 어느 날 우연히 가슴에 통증을 느껴 홈웨어 속을 들여다본다. 그 속에는 볼록 튀어나온 가슴 살결위로 핑크 빛의 꽃이 은은하게 피어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가슴의 통증은 사라지고 웃음이 나온다. 그 동안 나는 이들의 기능성에 집착함으로 예전의 기억을 미뤄놓고 있었다. 얼굴을 옷 속으로 깊게 넣을수록 또 다른 세계로 강렬하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서 묘해졌다. 보통 홈웨어를 입을 때의 몸의 자세는 다른 때보다 편안해져 좀 더 과감해진다. 나는 이러한 다양한 신체들의 모습과 옷의 강렬한 패턴의 만남을 인식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진통을 겪고 있는 지금 다시 그 숲을 보기 위해 뒤로 걸어가 본다. 어느덧 나는 마법의 약을 먹고 너무 커져 문을 통과하지 못한 앨리스가 되어 있다. 그리고 사진은 내가 다시 소녀 앨리스가 되는 또 다른 마법의 약이 되어준다.
박은광, Like an Afterimage, 2011. 8. 16 – 8. 30
미를 추구하는 당당한 열정으로 박은광은 작품을 통해 일상 속에서 균형미를 발견한다. 박은광의 작품은 꽃들 사이로 부서지는 빛, 삭막한 도시의 파사드를 부수어내는 현란한 색감, 거리에서 드러나고있는 조각적인 형태들, 땅과 하늘 사이에서 결빙 순간의 빛과 같이 보통은 간과되고 넘어가는 사물들 내에 존재하는 아름다움들을 일상 속에서 서사시적으로 극명하게 나타낸다. 그의 이미지들은 우리의 시각적 경계에 자리잡고 있기에 보이지 않던 강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보여준다. 그의 사진들은 시간의 영역 밖에서 존재하고 변형적이며 대체적인 사진적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찰나의 순간을 잡아내어 변형시킨다.
Jim Ramer, Associate Professor(Director MFA Photography, School of Art, Media and Technology)
갤러리룩스 2011 갤러리룩스 신진작가 공모 심사평
심사위원 배병우(서울예대교수)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출품된 포트폴리오에서 3명의 작가를 선정하는 일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만큼 3명의 작품이 여럿 중에 눈에 띄었고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되었다는 반증이다. 그 다음의 우열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박은광, 장유진, 황용일이 그렇게 선정되었다. 비교적 고른 기량과 시선을 간직한 이들은 무거운 개념이나 과도한 연출에서 빗겨나 차분한 감수성으로 대상을 응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심사위원들은 사진 자체의 힘과 흥미를 간직한 사진에 더 관심이 갔다. 그것은 분명 보는 행위로부터 출발해 그것이 남긴, 결국 보고만 것이 관자의 망막과 가슴에 상처 같고 여운 같은 심연을 파는 일이다. 그 구멍의 깊이가 아득한 사진이 좋다.
박은광의 사진은 핀홀카메라의 시선으로, 마지못해 수용한 세계의 비근한 정경을 감성적으로 보여준다. 몽롱하며 흐릿하게 다가오는 이 상들은 보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들 사이에서 흔들리는 듯 하다. 아무것도 아닌 풍경이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슬픈 진실을 여지없이 안겨준다는 점에서 좀 매혹적이다. 작가의 감성과 마음으로 건져 올린 풍경이다.
장유진의 사진은 발랄하고 도발적이다. 여자의 옷 사이로 잠입해서 찍은 사진, 마치 ‘아이스께끼’하고 소리치며 여자아이들의 치마를 들러 올려 기어이 그 안을 들여다보고자 한 악동들의 놀이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왜곡된 신체의 드러남이자 화려한 꽃무늬 치마 안으로 보는 이를 감싸 안는 체험을 주기도 한다. ‘왜상’의 흔적이 만들어낸 기이한 이미지와 묘하게 자극적인 상황설정이 흥미롭다.
황용일의 사진은 박은광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이 흑백의 사진이 담아내고 있는 풍경 역시 평범하고 적조하다. 그러나 무척 감각적인 사진이다. 아무것도 아닌 풍경과 사물이 작가에 의해, 사진에 견인되어 낯설고 모호하고 매력적인 존재로 돌변하는 기이한 체험을 안긴다. 사실 사진이 그런 존재일 것이다.
이렇게 3명이 선정되었다. 이들에게 축하 드리며 앞으로 이들 작품을 자주 접하기를 기원한다. 갤러리 룩스에서 매년 공모하는 이 행사가 앞으로도 ‘거품 속에 비수’ 같은 존재들을 건져 올리는 중요한 기능을 다 해나가길 바란다.
나의 주관은 경사에 관한 것이다. 아름다움을 살펴 찾는 것과 감상적인 두뇌를 자극하는 것 역시 각도의 관점에 끼워 맞추고 있다. 그것은 완만하거나 경사지거나에 관한 개인적이며 심미적인 설정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세상의 규칙에 근거하고 있다. 한마디로 35°는 두 발이 딛고 있는 땅과 그것으로 인해 접혀진 발목의 압박이며 삶의 단상이다.
35° 경사에 지어진 집들의 집단과 혹은 그의 주변은 이미 익숙하지 않다. 보이지 않아서 익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거나 방관해서이다. 그렇다고 다시 되짚어보자는 의중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두고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기록하는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집들, 전봇대, 새들, 잡풀 그리고 사람은 의미심장하거나 의도를 둔 객체는 아니다. 밀려나 있는 주체이다. 한걸음 떨어져 있는 주인공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진의 방법을 선택했으며 거리를 두고 찍었으며 포커스나 색감은 개의치 않았다. 하물며 프레임에 걸려드는 것 중에서 불필요한 요소들(사진이 기억에 관한 속성을 숙명적으로 내포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며, 즉시적인 기록에서 발생하는 시간의 개입과 주관을 벗어난 도상을 최대한 제거하는 것을 통해 현시적인 판단을 용이하게 하는 것) 또한 지워버린다. 기계적 수단은 사용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된다. 작업은 손이 쥐고 있는 칼, 송곳, 사포와 그들에게 맞닿아 있는 인화지의 물성에서 이루어진다. 긁고 문지르고 벗겨내는 과정을 통해 사진의 일방적인 면모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진다.
산동네에 지어진 판자촌에 이르는 길의 경사각, 자동차의 테스트 경사각, 스키 활강 각도, 적절한 산행 코스의 각, 영하 35°의 추위, 영상 35°의 더위 따위에 의미부여를 하고자한다면 소심한 대변일 수 있다. 그것들이 시사하는, 또는 암묵적으로 이루어진 규칙이 무엇에 근거하는가가 관심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조건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주어진 신체의 적절한 한계와 관계가 있다. 고꾸라지거나 뒤집히지 않으려는 각도이며 쓰러지거나 뒹굴지 않으려는 각도이다. 그것들의 중심에는 기술적인 장치나 최고치를 추구하기 위한 특별한 노고나 개발의 문제가 아니라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원초적인 결과물인 것이다. 우연하게도 이 모두는 즐거움과 수고스러움에 이른다. 즉, 그 둘은 한통속인 것이다.
사진은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나타나도록 찍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영상물이다. 또한 사진은 시간성의 문제를 필연적으로 안고 간다. 당신을 중심으로 찍은 사진 속에는 우연히 지나가는 다른 사람의 뒤통수가 함께한다. 그는 자기의 갈 길을 가는 것이며 아무런 근거도 없으며 그저 관계없음의 상황에 놓인 것일 뿐이다. 한 장의 사진 속에 내포한 무수한 배경, 수많은 선들, 색들이 돌이켜 보건데 전적으로 나와 관계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1/125만이 진실이다.
어느 날 어떤 집의 담벼락에서 ‘고추를 심었으니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요’라는 경고 문구를 본 적이 있다. 넘어다 본 담 저쪽에는 배추가 심어져 있었다.
1999년 개관한 이후로 젊은 작가들을 발굴은 물론, 기성 작가들이 자신들의 색을 잃지 않도록 다양한 전시를 기획해 온 <갤러리 룩스>가 2010년을 마무리 하고 2011년을 준비하면서 Flux 展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국내외에서 꾸준한 활동을 선보이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 갤러리 룩스가 주목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연례기획전으로, 매해 다른 주제를 가지고 다양하게 변모하는 전시이다.
<7 Sense>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일곱작가들의 프레임 너머의 새로운 시선과 사물에 대한 낯선 감각에 집중한 작품들을 전시하게 된다. <7 Sense>는 인간이 느끼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의 오감과 보이지 않는 끌림을 감지하는 육감외에, 발상의 전환을 통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창조적인 ‘제7의 감각’을 깨우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진의 기본적 성격인 기록성을 넘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을 선정, 그들이 어떻게 환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어떠한 감성으로 세상을 대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작가의 몫이고, 실재를 재현하는 것이 사진의 특성이지만 프레임 속 대상들은 현실의 것과 다른 옷을 입고 있다.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라는 인지체계를 흔들어 놓음으로서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은 대상이 주는 새로움과 경이로움!!
구성수, 구성연, 김수강, 사타, 임택, 한성필, 홍승현 <7 Sense>에 참여한 일곱 작가들은 유연한 상상력과 감성으로 관객을 새로운 감각의 체험을 유도한다.
현실에 뷰파인더를 대고, 색을 입히고, 시점을 조작하고, 인간을 사물화 시키고, 중력을 무너뜨리는 등의 그들마다 각기 다른 거리두기 작업을 통해, 현실과 판타지 속을 유영하고 있는 일곱 작가를 만나본다.
구성수는 근작 포토제닉 드로잉을 통해 사진의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포토제닉 드로잉 시리즈는 19세기 사진의 발명 당시 윌리엄 헨리폭스 탈보트 (William Henry Fox Talbot)에 의해서 만들어진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를 담고있는 명칭이다. 명칭은 19세기 방식을 따랐지만 그의 작업은 확장된 영역으로서의 현대사진의 무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구성수는 찰흙으로 식물의 모양을 본떠 만든 음각에 시멘트를 부어 굳히고, 찰흙을 떼어낸 후 거기에 채색을 한 후 사진을 찍어 결과물을 완성한다. 조각, 회화, 사진이라는 장르를 한장의 사진으로 압축시켜 놓은듯한 이 작업은 현대 미술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구성수의 작품이 19세기의 명칭을 차용한 현대미술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면, 김수강의 작품은 19세기 전통방식 그대로를 재현한다. 검프린트는 19세기 후반 인상주의가 시작될 무렵에 탄생된 기법으로, 작품의 사이즈와 네거티브의 사이즈가 같은 밀착인화 방식을 취한다. 수채화물감을 용해시킨 아라비아 고무에 중크롬산칼륨을 혼합하여 바르고, 여러 번의 자외선 노광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다. 김수강의 사물들은 실재와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 색을 재현하는 방식의 독특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위에 흔하게 접하던 사물들이 작가의 의도와 우연의 어디쯤에 닿아 묘한 색을 만들어 낸다.
구성연의 작업을 멀리서 본 관객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간다. 그녀의 사진작업은 언뜻 보면 어떤 모양을 표상화 하고 있다. 관객들로 하여금 ‘무엇’이라고 믿어버리게 만드는 색과 형태,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그 아름다움에 반해 작품에 다가서면 작가에 손에 의해 재창조된 인공적 산물 이라는 것에 놀라고, 그것이 전혀 다른 물성을 가진 재료로 만들어졌다는데 다시 한번 놀란다. 모란도를 재해석한 이번<사탕시리즈>는 고귀하고 기품있는 의미를 가진 모란꽃을 사탕이라는 가벼운 상징성으로 전복시킨다.
임택은 동양의 산수화를 ‘상상유희’를 통해 현대적으로 재해석 함으로서 동양화의 표현방법을 확장시킨다. 입체로 산의 형태를 만들고 카메라로 촬영한 뒤 무지개와 해, 구름, 나무, 동물, 사람, 정자 등을 배치하면서 작가의 상상력을 적극 반영한다.
사타는 자신의 기억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초현실적인 공간을 재구성한다. 텅 빈 주차장과 공원등 일상에서 만난 소우주에서 작가는 판타지를 경험하고 공간과 하나가 되어 중력을 잃고 공간을 부유한다. 어린아이 같은 상상력을 사진이라는 매체에 자신을 주인공으로 표현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일탈과 정신적 자유로움을 표현한다. 또한 가상의 공간을 현실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현실과 판타지가 교묘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한성필의 사진 속에서 우리는 착시효과를 경험한다. 우리는 그 공간을 갸웃하며 바라보게 된다.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가짜일까?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의 재건축 현장의 가림막을 절묘하게 촬영한 사진 속에서 마치 도시는 하나의 장난감같이 보인다. 그의 사진은 익숙한 도시 풍경을 환상의 세계로 만든다
홍승현의 작업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을 사물화 시키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잊고 기계처럼 반복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을 풍자화한 모던타임즈 시리즈는 딥틱이라는 방식으로 나란히 두장의 사진을 배치함으로서 표현을 극대화하였다. 버스손잡이와 빨래라는 이질적인 소재의 나열로 연결고리를 만들고 관중에게는 물음표를 던진다. 버스에 서있는 현대인을 축늘어져 반복적으로 매달려있는 빨래로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 대한 냉소와 비판이 담겨있다.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실험적 사고와 표현력에 사진이라는 진실성이 더해져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 연결을 더 유연하게 만들었다. 갤러리룩스에 초대된 일곱작가들은 가상의 공간을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도, 현실을 확장시키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방법론으로 무대를 만들어 간다.
이정현, A Little More or Less than Nothing, 2010. 8. 4 – 8. 17
이정현의 사진 정치적으로는 옳지 않을 수도 있지만, 멕시코에 있는 동안 나는 투우장에 가는 것에 푹 빠지게 되었다. 많은 경기를 보았는데, 어떤 것들은 끔찍했고 어떤 것들은 환상적이었다. 내가 왜 투우에 그렇게 끌리게 되었는지 알아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투우를 보면서 나는, 투우 의상의 아름다움과 투우사의 우아함이 한 동물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만들어내는 대조가, 삶 그 자체에 대한 완벽한 비유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비록 처음 본 순간부터 이정현의 사진에 끌리기는 했지만, 이를 이해하는데에도 역시 시간이 필요했다. 이정현의 사진은 굉장히 아름다우며, 동양의 감성과 서양 미학 간의 균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설명하거나 묘사하지 않는다. 순응적이고 직관적인 태도로 시각적인 세계에 반응하고, 단순히 보여지는 것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기록한다. 사진에 담긴 내용이 그 뒤를 따라 오지만, 결코 강요되지는 않는다. 그녀의 사진은 보는 사람들이 조금 더 파고 들어오도록 한다. 나는 바쁘고 지친 일상의 내가 아닌 내 안의 깊은 곳 어디에선가 그녀의 사진을 만난다. 그녀의 사진 속에는 상징들이 존재하지만 그녀의 사진을 단순히 상징적인 것으로만 읽는 것은 실수이다. 그 안에는 이성적이지는 않지만 굉장히 지적인 감정들이 담겨있다. 이는 그녀의 사진에서 나타나는 내용과 형식 사이의 이음새없는 결합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의 사진에서는 주제와 배경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 이정현의 사진은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력을 가지고 무언가를 분명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술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Philip Perkis
김정회, Light in the Night, 2010. 8. 18 – 8. 31
1979 부여 출생 2009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진학과 졸업(M.F.A) 개인전 2005 There, See, 갤러리 카페 브레송, 서울 단체전 2005 광복 60주년기념사진전, 세종문화회관 광화문 갤러리, 서울
갤러리룩스 2010 신진작가공모전 심사평
심사위원 박영택(경기대 교수, 미술평론)
오늘날 젊은 작가들은 이전에 비해 전시의 기회가 풍부해졌고 그만큼 작품을 발표할 공간 및 다양한 지원제도를 비교적 풍요롭게 향유하고 있다. 몰론 불가피한 심사와 선택이라는 일정한 틀, 턱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과거와는 사뭇 다른 상황인 것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저런 계기가 되어 여러 공모전이나 지원프로그램을 통해 상당수 작가들의 작업을 포트폴리오로 혹은 CD나 컴퓨터를 통해 접하고 있다. 갤러리룩스가 마련한 신진작가공모전 역시 중요한 작가지원시스템이다. 이번 심사를 통해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보았다.
비록 사진에 한정되긴 했지만 동시대 시각이미지의 일정한 흐름이나 경향을 만날 수 있었다. 오늘날 장르개념은 사실 무의미해진 편이다. 그러나 주어진 매체를 선택했다면 그 매체의 특성, 다른 매체와 다른 그 매체만의 독자한 성질이나 특성을 자기 작업의 도구로 이용하는, 언어화 하는 나름의 필연성이나 당위성 같은 것은 불가피하게 요구되어 보인다. 그러니까 사진작업을 한다는 것은 매체와 내용 간의 긴장관계 내지는 그 둘의 절실한 접촉지대를 문제의식으로 끌어안을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적지 않은 숫자가 출품했지만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었다. 아울러 작품의 수준 역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도 아니었다. 의외로 선택은 쉬운 편이었다. 이 좋은 기회를 활용하려는 많은 작가들의 참여가 있었으면 한다. 수상작가로 2명이 선정되었다.
도시의 어둠과 그 어둠 속에서 발광하는 인공조명, 빛을 매력적인 색채로 절여낸 김정회와 비근한 일상의 공간을 담담한 시선으로 건져 올린 이정현, 이 두 작가가 그들이다.
김정회의 사진은 프레임 하단에 바싹 걸쳐진 건물의 외곽선과 그 사이로 번져 나오는 빛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풍경이다. 단순하고 명료하면서도 무척 감각적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가의 색채감각이 도회적 감수성을 대변한다는 생각이다. 상대적으로 덜 보여주는 이 사진이 지닌 이미지의 희박성은 공간을 채운 색채가 대체하고 있다. 어두운 것도 아니고 밝은 것도 아닌, 분명 저녁이지만 도시의 밤은 인공의 조명과 빛에 의해 어둠을 잘라내거나 분절시킨다. 그것은 이상한 시간의 감각을 안긴다. 도시는 빛에 의해 낮을 연장시키거나 잠 못드는 불면의 조명으로 차갑게 발광發光한다. 사실 단조로운 사진이지만 감각적인 구성과 도시의 색상을 파악하는 눈에 점수를 주었다.
이정현의 사진은 일상의 비근한 한 장면을 문득 초현실적인 조우마냥 제시한다. 소소한 순간에 담겨진 기이한 아름다움이랄까, 또는 어딘지 불안하고 불안정한 미묘한 모순을 그대로 제시하는 사진이다. 그것은 일상적 사물에서 또 다른 상황을 읽어내는, 몽상을 지닌 예술가들의 전형적 시선을 보여준다. 바로 그 점이 이 작가의 은근한 매력이면서도 동시에 어딘지 상투형을 지니고 있다는 아쉬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작품에서 보이는 비범한 시선의 힘에 격려를 보내고자 한다.
갤러리룩스 2010 신진작가공모전에 선정된 이 두 작가에게 축하를 보내며 이번 기회가 앞날에 큰 힘이 되기를 기원한다. 아울러 이런 기회를 매년 마련해주신 갤러리룩스 측에도 감사를 깊은 감사를 드린다.
민경숙이 보내온 그림들을 본다. 먼 곳에서 온 아련한 편지 같다. 한결같이 적조하고 고독하고 쓸쓸하다. 말을 지운 자리에 고요한 이미지만이 파리하게 응고되어 있다. 언어와 문자는 부재하지만 남은 이미지는 어떤 감정과 느낌을 그대로 안긴다. 한 작가의 인성과 마음의 결, 감각의 체로 걸러낸 세상의 풍경이 거기 있다. 작가는 식빵과 먹다 남은 도넛, 일상의 사물, 건물과 집들, 나무와 누군가의 살/피부를 그렸다. 가만 들여다보면 그 모든 것들의 피부 위에는 모종의 흔적, 상처가 있다. 곰팡이가 핀 식빵, 한 입 베어 문 도넛, 무수한 칼질을 받았던 도마, 몸에 난 상처나 피부에 잠긴 초록의 핏줄, 소파 천 위로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균사, 건물에 드리운 햇살과 그림자 등이다. 그것은 사물의 표면에 서식하는 시간의 자취이자 그것과 함께했던 그 누군가의 자리다. 모든 존재는 타인의 기억을 간직한다. 그것은 우선 피부에 남아 있다. 지금은 부재하지만 한때 그것과 연동되어 있었던 또 다른 존재가 남겨놓은 흔적이자 상처다. 상처는 불가피하게 나와 다른 것이 만날 때 생겨난다.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를 숙주 삼아 산다.
비닐 팩에 담긴 식빵에 곰팡이가 피었다. 초록의 균사는 시간의 진행에 따라 점점 번져 식빵의 표면을 덮어 나간다. 썩어간다. 상처를 입은 자리에서 조금씩 차오른 죽음, 그리고 부재로의 이동이다. 말랑한 식빵의 질감에 파고든 이질적인 곰팡이는 차라리 황홀하다. 모든 존재는 그렇게 타자가 남긴 치명적인 상처 속에 소멸해간다. 둥근 도덧에 누군가의 이빨 자국이 자리했다. 그것을 베어 먹고자 욕망했던 이의 치아와 혓바닥과 침이 머물다 사라진 자리다. 빵 한 조각을 삼켰던 이의 깊은 목구멍과 식도와 생의 길처럼 아득한 창자가 떠오르는 자취다. 욕망이 슬쩍 비켜간 자리에 되돌릴 수 없는 심연 같은 구멍이 생겼다. 1,000번의 칼질을 받아낸 도마는 얇고 가는 선들을 문신처럼 간직한다. 도마의 바닥, 피부에 내려앉았던 칼 소리가 환청처럼 들릴 듯하다. 그 칼 소리는 무엇을 베고 잘라내며 떠돈 여운이었을까? 빈 위장을 채우기 위해, 한 끼의 식사를 하기 위해 무수한 칼질을 받아내야 했던 도마의 살풍경.
누군가가 앉았던 푹신한 소파는 조심스레 꺼진 자리를 통해 그/그녀의 무게와 실존의 자리를 증거한다. 어느 한 순간의 상황성을 시각화한다. 그곳 여기저기에 균사가 창궐한다. 얼룩들이 마구 번져 나간다. 기이하고 낯설다. 안락하고 편안한 소파가 일순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일상의 사물들은 그렇게 낯익고 편하다가도 문득 기억과 상처에 의해 돌연 낯설고 끔찍한 존재가 되어 나를 덮친다. 그런가 하면 가구도 없는 흰 벽, 바닥과 걸레받이 그 사이 어딘가에 다만 빛과 그림자가 만든 순간적인 자취만이 아롱지는 풍경이 보인다. 머지않은 시간에 사라져버릴 한 조각의 빛, 덧없이 스러지는 자취, 소멸하는 상처들이다. 아무것도 아닌 풍경이자 너무도 범속한 장소에서 찾아낸 이 시선은 결국 작가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 같은 이미지를 만든다. 발견해낸다. 자기 자신의 감정과 마음이, 대상을 보는 연민이, 시선이 그렇게 내려앉아 있다. 사람이 부재한 적막한 풍경 역시 그렇다. 쓸쓸하고 호젓한 집들이 나무와 함께, 따뜻한 노랑색 불빛과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는 어둠 안에 그렇게 있다. 이 세상의 사물들은, 모든 풍경은, 저마다 고독하게 자리하고 있다. 호퍼의 풍경화가 연상되는 그런 그림이다.
종이 위에 파스텔로 문질러 안착시킨 그 이미지들은 빛과 어둠의 미묘한 차이 속에서 반짝인다. 어둠에서만 빛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어둠은 빛이 있어야 비로소 자신의 캄캄함을 증거한다. 집은 풍경 속에서 아름답고 모든 사물은 누군가의 흔적 속에 제 생애를 증거한다. 조심스레 나를 둘러싼 세계를 살핀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재현하고 특정한 이념이나 논리를 구축하기 위해 찾아 나선 탐사가 아니라 다만 하루의 삶에서 만나고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나 체험이다. 작가의 동선은 방 안에서 부엌으로, 식탁과 테이블 위로 그리고 몸과 피부 사이로 떠돈다. 집을 나서서 하늘과 땅, 나무와 숲과 건물과 집들이 바라다 보이는 길가로 나서고 그 길을 걷고 그렇게 보고 접한 것들을 가슴의 갈피에 접어 넣고 돌아와 이를 그렸다. 너무 평범해서 진부하기조차 한 것들이 작가의 마음과 손끝에서 새롭게 환생했다. 약간은 흐릿하고 흔들리고 그만큼 모종의 떨림과 여운을 안기면서 이 세상이 덧없이 사라지는 순간이 화면 안에 자리 잡았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미국으로 간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가기 전까지 그토록 많이 그렸던 자화상은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보내온 이 그림들은 한결같이 작가 자신의 삶의 반경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을 그려 넣고 있다. 무엇이든지, 매일매일 그것들을 그리고 있었다. 늘/매일이라는 삶의 시간과 공간을 화두 삼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일상에 삶이 있고 미술이 있었다. 아니 미술이란 게 별것 아닐 수 있다는 묵언이다. 동시대 미술의 과도한 스펙터클과 시욕망, 현란한 논리성을 지우고 자기 주변의 일상과 사물들에 보내는 이 예민하고 감성적인 눈과 마음이 파스텔 가루와 함께 으깨지고 뭉개져, 종이 표면 위로 쓰라리게 붙어 있다.
매일, 일상이라는 평범한 시간과 공간 속에 담겨진 놀랄 만한,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있는 작은 안경에 묻혀 있는 작가의 눈이 새삼 떠오른다. 무엇을 찾고 있을까?
“나는 무엇이든지 시각적, 감정적, 심리적으로 내 관심을 끄는 것을 그리려고 한다.”(작가 노트)
애초에 무엇을 그리겠다는 인식과 그림에 대한 선험적인 의도를 지우고 자기 눈과 마음을 세상에 맡겼다. 그린다는 것이 친숙한 하루의 일과가 되었고, 그래서 매일의 생활을 담은 짧은 일기나 시 같은 그림이 되었다. 그렇게 작가는 세계를 떠다닌다. 유동한다. 모든 사물의 피부 위를 거닌다. 그곳에 난 상처를 보듬는다. 힘껏 껴안는다. 여전히 살아 있는 오늘과 그림 그리는 행위는 그렇게 구원 같고 치유 같다.
작업노트
민경숙
아름다움과 잃어버림
시간과 기억
텅빔과 감사함
온기와 친밀감
이야기와 상징
공간과 거리
멜랑콜리와 고독감
침묵과 평온
유머와 위로
정직함과 유일성
인생과 신비
은근함과 깊이
다침과 상처
단순함과 시적인 집약성
이러한 것들이 내 가슴에서 내 그림으로 전달되어지기를 원한다.
그것을 위한 그림의 소재로 음식, 가구, 빛, 공간, 건물, 나무를 선택한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나는 무엇이든지 시각적, 감정적, 심리적으로 내 관심을 끄는 것을 그리려고 한다.
97년 즈음 미국으로 건너오면서부터 시작되고,
02년 뒤늦게 다시 돌아간 뉴욕의 대학원시절부터
내게 절대적으로 허락한 이 무엇이든 그려도 된다라는 ‘자유로움’은
한국에서 12년간 오직 자화상을 그렸던 내게 그림과 인생을 생각하는 관점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린다는 것이 좀더 친숙한 하루의 일과가 되었고
극적이거나 이야기가 많이 담긴 소설이라기 보다
매일의 생활을 담은 짧은 일기이거나 시에 가까운 형식이 되었다.
(물론 이런 과정이 어느날 쉽게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며 그 사이의 이러저러한 고통과 갈등, 헤매임, 기쁨, 해방감, 그리고 결심.. 등등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다 )
그 매일이라는 평범한 시간안에 담겨진 놀랄만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아마 내가 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김청진, a delicious dinner or not, 2009. 8. 5 – 8. 11
충분히 매력적인 파스텔계열의 색상. 보송보송한 느낌의 솜사탕을 손으로 뜯어 입안에 가득 넣고 혀로 살짝 살짝 녹여가며 맛을 느끼면 사실 너무 달아 물을 찾게 된다. 입안에 들어간 솜사탕은 처음크기가 상상이 안될 정도로 허탈하게 작아지고 온도가 조금이라도 올라간 상태에서 솜사탕을 손으로 만지면 끈적끈적한 그 촉감이 너무나도 불쾌하게 전달된다. 이러한 솜사탕의 특성은 나에게 있어 중요한 작업의 키워드로 연결시킬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된다. 나의 소유욕은 남들보다 조금은 대단해서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일주일 안에 갖고 만다. 그 습관은 어릴 시절부터 시작되어 지금도 가끔 자제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이런 점은 자연스럽게 음식과도 연결이 된다. 음식에 대한 나의 집착 아닌 집착은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잠을 자다가 꿈에서 특정한 음식이 나오거나 갑자기 어떤 음식이 생각날 경우 그 다음 식사시간이나 다음날 꼭 먹고 만다. 특히 내 경우에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아니 단순히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떡볶이를 먹을 때라도, 이미 뱃속의 과다한 포만감으로 인해 불쾌함이 느껴지지만 마음 한 쪽에서는 이미 음식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아쉬움을 느낀다.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미지들에 집착하며, 부드러운 듯 말랑말랑한 색감의 이미지들로 시작되어 살짝 비꼬는 것 같은 이미지로 끝나는 점, 그리고 각기 그것들이 가진 특성과 사용하는 재료나 매체들은 다르지만 그것들을 ‘김청진의 그림(사진)’으로 만드는 점은 마치 홍상수의 영화와 닮아 있다. 나는 홍상수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서울 강북의 변두리가 주요 무대인지라 아주 익숙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촬영당일 간단한 메모나 감독이 직접 얘기해 주는 이야기들로 배우들이 즉흥연기를 하는 점과 감독 특유의 일상적인 면을 집어내어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고 낯선 느낌을 갖게 하는 부분을 좋아하기도 한다. 그리 논리적이지도 않은 부분들도 많고 이해가 되질 않는 부분들도 있지만 전체의 흐름으로 보아서 이상한 느낌은 받지 않는다. 조금은 촌스러운 듯 연출된 퀵-줌(Quick-Zoom)을 비롯한 투박한 앵글, 단순한 자막들 그리고 그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인 특정한 특징이 있는 배우도 그렇지 않은 배우도 그의 영화 속에서는 모두 ‘홍상수 식의 배우’로 만들어 버리는 점들이다. 그리고 항상 그의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기대하고 꼭 보는 나는 항상 관람 후엔 기분이 나빠져서 극장을 나온다.
서영철, ….. a one’s walk (걸음걸이), 2009. 8. 12 – 8. 18
공간 속에서의 움직임 그리고 그 느낌마저도 포함된
생물, 무생물, 흔들림, 멈춤, 빠름, 느림 등…
하나의 걸음걸이로 모아진다.
지나온 걸음걸이로 말미암아 역사가 이루어졌고,
앞으로의 걸음걸이는 어떻게 이루어져 갈까?
설레임과 더불어 새로운 걸음을 내디뎌본다.
성정원, 일회용 컵, 2009. 8. 19 – 8. 25
언제부터인지 ‘얼마나 많은 일회용 컵을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맞닥뜨려 지게 되었고, 소비 중심 사회에서 대량생산되는 일회용 컵으로부터 물질과 자연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흙으로, 유리로, 혹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용기를 대신하여 종이로, 플라스틱으로,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일회용 컵의 편의성에 익숙해져 버렸다. 2002년부터 일회용 컵의 일회성에 관심을 갖게 된 나는 2004년부터 ‘일회용 컵(disposable cups)’을 주제로 예술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
생활 속에서 직접 사용했던 종이컵을 촬영한 ‘일회용 하루’는 수없이 똑 같은 일회용 컵들이지만, 특정일 특정장소에서 사용한 특정 디자인의 일회용 컵은 어느 순간 유일성이라는 개념으로 다가온다. 단 한번 사용하는 컵은, 역시 단 한번 밖에 없는 내 일상의 하루 중 일부분을 담는 기억인 것이다.
일그러진 일회용 컵 형체를 모티브로 한 ‘무제’ 시리즈는 새로운 시각으로 형태를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할 뿐만 아니라 대체된 재료(점토)에 대해서도 나에게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다.
조준용, Powerplant of City, 2009. 8. 26 – 9.1
한 치의 빈공간도 없이 늘어서있는 古건물과 高건물들 속에서 나에게 도시는 낯설면서도 낯익은 삶의 공간이다. 도시라는 공간을 정의한다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활동이 중심이 되는 장소’이지만, 그 어느 부분에도 속해있 지 않는 나에게 도시란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관찰의 대상이다. 그렇다고 어떠한 사회학적 관점을 두거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현상을 분석하여 새로운 사실을 전달하려는 목적도 없다. 그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새로운 공간과 풍경을 찾는 흥미로움으로 나의 작업은 시작되었다. 도시가 보여주는 낯익은 풍경 속에 낯선 공간을 찾는 것은 마치 내방 침대 밑에 있는 다른 세계를 관찰하는 것처럼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이런 관찰자적인 시점으로 도시 속에 존재하는 발전소를 발견하게 되었다. 발전소는 도시에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며,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 에너지를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 가지런히 진열된 물질화 된 상품을 소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비-물질이지만 물질보다 더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으며, 현대인들에게 에너지에 대한 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높아져 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좀 더 관조적인 자세로 발전소를 바라보기로 하였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상에 대한 어떠한 사실을 전달하는 목적이 아닌, 낯익은 도시의 풍경 속에 낯선 공간이 갖고 있는 심미적인 특성을 찾아내고자 하는 나의 시각적인 버릇 때문일 것이다. 처음으로 발전소를 보게 되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가쁜 숨을 내쉬는듯한 발전소의 거친 소음과 하늘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양의 수증기를 바라보며, 강렬한 위압감에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한순간 대기 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를 바라보며 생성과 소멸이라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순환적 특성에 대해서 깊이 사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가가지도 멀지도 않는 곳에서 에너지가 생성되고 소멸하는 순간을 바라본다. 그것은 아마도 도시 속에서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비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삶과 같은 모습 일 것이다.
두살적 뜨거운 물에 상당부분 화상을 입었답니다 지금은 오른팔에만 흉터가 남아 있었지만 그때 당시엔 제법 심각해서 제법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그 영향으로 물만 보면 기겁을 하게 되었지 뭡니까 그러다 이십대 중반에 처음 물을 접하게 되었던 날 두려움과 새로운 자극 그리고 편안함이 교차로 정신을 때리면서 삽시간에 이전의 기억이 해소되는 경험을 한적이 있답니다. 충격 받았을 때 정신을 차단하는 꺼풀이 씌워지는 느낌이 듭니다. 마치 자동 싸구려 보호막이 펼쳐지는 시스템처럼요. 수면과 공기의 경계 그속에 갇혀 있었던 시기의 느낌과 그곳을 벗어나 접하게 된 감정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의 십세와 삼십세 사이를 말하기도 합니다. 평생을 연못속에서 살던 물고기가 막을 뚫고 다른 차원인 물 밖의 세상에서 숨쉬기를 터득하게 된 경우에도 대입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자극을 통해 오랜 세월 거치며 자리잡은 일련의 대상에 대한 두려움의 경계도 단 몇 초만에 허물어 버릴 수 있는 마음의 경계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고가 굳기전인 천진난잡했던 시절 자유로웠던 대가리속을 답사하는 작태라 하겠습니다.
꽁꽁 숨겨놓았던 기억들은 물질 속에 봉인되었다가, 불쑥 예기치 않은 대상과의 조우로 나타난다. 어떤 기억은 당혹스럽고, 어떤 기억은 달콤하게 포장되어 가장 행복했을 어느 시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우연히 한 입 베어 문 마들렌 조각이 잃어버렸던 과거의 기억을 재생시켜 주는 것처럼 일곱 작가들의 상상력을 모은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갤러리 룩스>라는 상자안에 어릴적 달콤한 기억을 재생시켜주는 장치로서 작용한다.
임안나는 기억과 상상을 오가는 “상상 유희”를 통해 상상 속 공간 과 사물을 재구성함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연출해 낸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새하얀 공간속에서 오브제들은 기능과 관념을 잊은 채 망상과 현실사이를 부유한다. 손준호는 잊혀져버린 어린 시절의 호기심을 일탈을 꿈꾸는 동화적 캐릭터를 통해 위트 있게 연출하고 임준영은 도시 속 인간의 생명력과 활동성을 건축물과 물 사이의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인화하는 과정에 쌀을 뿌리는 기법으로 동양의 주술적인 전통과 소망을 표현하는 하형선의 창 밖 풍경은 한줌 뿌려 놓은 쌀알 흔적들로 인해 생경한 풍경을 연출해 낸다. 이 우연한 효과는 관람자로 하여금 눈이 오는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조각을 전공한 김보라는 생명력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물이라는 매체를 통해 사물과의 소통을 꿈꾸고, 지희장은 이제는 접하기 힘들어진 ‘옥춘’을 소재로 이제는 사라져가는 알록달록 색색의 아름다움을 설치와 퍼포먼스 비디오 작업을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 조은강은 비누방울의 우연적이고 찰나의 세상을 사진적인 순간의 미학으로 표현한다. 그녀가 만드는 비누방울은 홀연히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붙잡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는 어떤 꿈같은 세상… 그리고 환상…
<달콤한 상상>에 초대된 이 일곱 작가는 자신들의 꿈과 실험적 사고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갤러리 룩스 안에 들여놓았다. 코끝이 빨개지고 시린 겨울날, 이들의 작가의 풍부한 사고와 상상력을 통해 달콤하고 따뜻한 꿈속으로 빠져들어 함께 소통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갑철은 신작 파리(Paris) 사진을 통해 대도시에 대한 자신의 내밀한 감성을 특유의 역동적 시각을 통해 형상화시켜내고 있다. <충돌과 반동>, <에너지> 전에서 천착해 왔던 기(氣), 신(神), 혼 (魂) 등 무형이되 생을 주재하는 근원적인 요소들은 이번 작업에서 도 저변을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국이라 고 해서 생명이 다를 수는 없는 것이다. 전작에 주로 등장했던 토속적인 소재들은 이번 작업에서 자취를 감추고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큰 변화를 말하지는 않는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어떤 대상을 보느냐가 아니라 대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기 때문이 다. 유럽의 대도시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은 여전히 전작에 흐르고 있었던 바로 그 시각인 것이다. 피사체의 힘에 의탁하지 않고 자신의 시각을 지켜낼 때 대상의 선택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같은 방법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각의 힘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해석하는 대도시 파리는 어떤 모습인가. 파리는 대도시의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문화적 감수성이 가장 일찍 싹튼 곳이다. 비좁고 불편한 도로가 확장, 정비되어 도시적 편리함이 생겨나고, 더럽고 불결한 인구밀집 지역에 상하수도 시설이 들어서 깨끗한 주거환경이 조성되는 등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삶의 공간이 대도시 파리였다. 생활환경의 변화는 곧바로 새로운 감성을 부르는 법이지만, 도시의 변화 속도는 새로운 감성이 그것을 곧바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빨라 이제 도시적 감수성은 새로움에 대한 무기력한 수용이 되고 그것 은 다시 새로움에 대한 갈망으로 귀착한다. 그것이 보들레르의 도시적 감수성의 일면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옛 것에 대한 향수는 새로움에 대한 갈망 속에 잠재되어 있어 새 것을 빠르게 수용하는 감수성에는 새 것 자체에 대한 드러나지 않는 증오가 섞여 있다. 그것이 벤야민의 감수성이다. 옛 것과 새 것이 어지럽 게 뒤섞여 있는 대도시 파리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전통과 현대의 현기증 나는 조합이 어쩌면 이방인 인 작가에게도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점차 작가는 도시의 곳곳에서 그 조합 속에 감춰진 생의 기운을 본다. 그것을 도시의 혼(魂)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작가가 보는 것은 북적이는 사람들이나 빠르게 지나다니는 자동차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도시의 역동성이 아니라 정적 속에서도 기를 발산하는 모든 물질들의 생명이다.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여신의 조각이나 광고 입간판, 포스터에서 도 생명은 은근히 퍼져 나온다. 밤거리를 빠르게 지나가는 여인 들, 고혹적인 눈길로 행인을 응시하는 광고 이미지 속의 여인도 그렇다. 작가는 깜박거리는 신호등이나 공중에 매달려 있는 정체 모를 장식품에서도 도시의 혼을 본다. 그것은 도시의 구석구석에 널려 있는 것이어서 이름 모를 골목이나 창밖의 풍경, 사람들의 발걸음, 밤거리의 네온 싸인 등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작가가 감지해 낸 도시의 혼은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고 스산하여 파리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교란시킨다. 유령과도 같은 형체로 성당 앞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이나 산 사람처럼 진한 우수에 빠져 있는 포스터 속의 형상, 마치 공중에 매달린 것처럼 보이는 목 없는 사람의 자태 등에는 음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혼이라는 것이 본래 생명의 경계를 넘어서 있어서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처럼 대상에 얽매이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무형의 신(神)이나 기(氣), 혼(魂)과 씨름하는 작가의 한결같은 시각이 어떻게 확장되어 나갈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