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문의 가장자리 The Edge of Mystery
  • 함혜경 Ham Hyekyung
  • 2019. 11. 8 - 12. 8  

과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자, 다른 상념들은 사라진다

곽노원

 

 몰입을 위한 전당을 흉내 낸 어스름한 방. 등받이도 없는 의자 비스무리 한 것에 어수룩하게 앉아, 이렇다 할 입장과 퇴장 시간도 없이 시작과 끝이 접붙어버린 영상을 바라본다. 새로 들어오는 관객, 자리를 떠나는 이, 중첩되는 소리들, 프로젝터의 희끄무레한 빛, 부침을 반복하는 스크린의 경계, 그 동인이 무엇이든 이내 시선은 갈피를 잃거나 기를 쓰고 초점을 맞추려 한다. 물론 비단 영사를 지지하는 물리적 조건들만이 문제는 아니다.

  5년인가 6년 정도 전, 날이 매서워지는 무렵이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혹은 그렇지 않을지도. 하루나 이틀만 지나도 기억은 지표를 잃는다. 작업은 신발을 만드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 기억한다. 실패가 여럿 걸린 재봉틀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 같다. 그 이미지들을 (앞)뒤로 하고 어떤 이가 고단한 어투로 자신의 실패를 읊조렸다. 딱히 구체적인 실패의 이유 따위는 없었다. 다만 단조롭고 어눌한 발음의 목소리가 실패의 징후를 여실히 흘리고 있었다. 이것은 자전적 이야기다, 하고 단정했다. 작가를 소개받았던 것 같지만, 여느 오프닝이 그렇듯 무수한 인사만 남을 뿐 사람은 남지 않았다.

  혹자는 이 영상들의 독특한 이미지가 갖는 강렬함, 왜곡, 평범하지 않음과 직접성이 다른 곳이 아닌 문화의 보관소에 들어와 있을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이루는 흐름의 비서사성, 은유성, 지루함과 단속성이 이 ‘영상’들의 가치와 특성을 결정짓는다고도 말해진다. 그것은 옳은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 ‘영상’들은 명멸하고 스쳐지나가며 그 흐름은 은유를 타고 끝없이 미끄러진다. 종내 누구도 만장일치로 끄덕일 수 없으나 그 어떤 것보다도 명확한 지점을 향해 끊임없이 끌고 들어가려 한다..

  돌이켜 보면, 작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물론 모든 만남은 우연일지 모른다. 필연 따위는 우연의 연속 끝에 마지막에서야 발견된다. 어쨌거나 마주하고도 작가를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 이후로부터는 꽤나 긴 시간을 두고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많은 이야기를 했고 한 번의 전시를 했다. 혹은 한 번의 전시는 많은 이야기를 위한 핑계였는지 모른다. 아니면 많은 이야기는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몇 번의 개인전, 참여하는 대부분의 기획전에 열심히 들렀던 것은 단순히 우리가 가까운 동료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두 가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나는 작가의 작업이 사소설과 유사한 차원의, 자전적 독백만일 것이라는 단정이 옳지않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하나는, 동일한 차원에서,  작가의 이야기로 치부되는 작품과 작품 속 인물의 이야기가 왜 너무도 익숙한 일들로 이해 되는지였다. 익숙한 차원을 넘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기억이나 이야기가 나도 모르는 새에 불쑥 튀어 나와 있는 것과 같은, 작품이 주는 묘한 기시감의 원인을 확인해야 했다.

 

 이미지와 소리가 흘러간다. 강렬하나 불분명한 이미지들이 미끄러지듯 결합해 자신들만의 당위적인 쳇바퀴를 굴린다. 하나의 이미지를 장면을 시간을 보낼 때마다 우리는 다음 이미지와 장면, 시간과 마주하며 그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애쓴다. 쳇바퀴의 구름 끝에 있을 어떤 이야기의 완성된 종결을 예측하기 위해. 하지만 시선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들은 이내 흐릿해지고, 눈앞의 것들은 그 안개 속으로 쉬이 빨려 들어간다. 그 와중에 다가올 이미지, 장면, 시간들은 찰나적으로 눈에 닿아 금세 흐릿한 저편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까지는 짐작만이 가능할 뿐이다. 결국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읽기’ 위해서는, 바꿔 말해 모든 이미지를 눈앞에 펼쳐 놓은 것처럼 ‘보고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한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작가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 한 화자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있다 해도, 모든 것을 자신의 기억으로 환산하는 주도적인 화자가  있다. 다만 화자가 내뱉는 말들에는 어떤 구체적인 사건이 없다. 그래서 그 말들에는 어떤 특정한 순서를 구별할 만한 기준들이 없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을 수식하는 데에는 항상 ‘서사’라는 단어가 따라 붙는다. 시간이나 사건의 흐름 혹은 그와 유사한 순서. 각각의 작품에서 그 ‘서사’를 찾아보려 애쓴다. 물론 매번 발화가 시작되는 어떤 맥락이 틀처럼 존재한다. 연인으로부터 배신당한 30대 무렵의 세일즈맨, 아버지에게서 구식 전파상을 물려받은 한 고독한 사람, 오랜 연애 끝에 위기에 처한 연인들, 절망의 기로에서 탈출구를 바라고 있는 남자, 잘난 연인에게서 자신의 허물을 보는 사람, 돌연 사라진 천재 건축가에게 스스로의 불안을 투영하는 이. 그러나 모든 화자의 이야기에는 뚜렷한 시작도 결말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하다. 무한히 보는 것은 무한한 시간으로 있는 것, 무한한 시간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영상이 놓인 곳의 열고 닫음의 시간과 동시에 생에 주어진 시간의 유한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흘러가는 시간만큼을 감내한다. 끝내 남는 것은 이미지의 흐름에서 눈을 뗀 순간을 딛고, 이미 지나가 벌써 흐릿해지기 시작한 기억들을 긁어모아 내리는 사후적 판단뿐이다. 혹은 종결된 시간을 한 눈에 바라보며 기록된 묘비명과 같은 텍스트로부터, 이미 속절없이 지나가고만 영상의 궤적을, 그 ‘의도’를 확인할 수밖에는 없다.

  다만 이들의 고백에서 집요하도록 반복되는 것은 좌절로 각인된 과거, 뚜렷이 잡히지 않는 흘러간 나날에 대한 회환들, 속절없이 손을 빠져나가는 나날들, 예측할 수 없이 펼쳐진 시간에 대한 불안, 그 뿐이다. 이미 존재하던 이미지이던 혹은 직접 촬영된 것이던 길어올려진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미지. 그 위에 덧씌워진 이국적이고 어수룩한 나레이션. 이들은 미미한 지시적 관계나 우연한 관계로 접붙어 있다. 하지만 화자가 토로하는 삶의 상실감과 불안 속에서 일종의 개연성을 지닌 ‘서사’로 발견 된다. 따라서 이 영상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것, 읽어내야할 것, 대단원에 다달아 앞에서 보았던 것들을 종합해 확인해야 하는 의미 따위는 없다. 따라서, 그 덕분에, 우리가 작품에서 마주할 것은 모조리 읽어나 감각하기엔 넘치는 눈앞의 이미지와 그래서 언제나 놓친 부분이 있는 지나간 이미지, 그리고 새로이 밀려올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의 시간들, 즉 영상을 마주 앉아 있는 불안한 시간이다. 그것은 동시에 영상 앞에 다다르기까지의 우리의 기억들, 시간들을 인양한다. 

 

나는 그의 작품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보았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 내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내 자신과 내 미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시간을 버티기 위해 애쓰고 있다.* <모든 사람은 수수께끼>, 2020, 단채널비디오, 사운드, 컬러,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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