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locks
- 박찬민 Chanmin Park
- 2015. 12. 8 - 12. 23
21세기 주거와 도시에 관한 사진적 고찰
신혜영 (미술비평)
한국 아파트에 관한 프랑스 지리학자의 신랄한 분석으로 주목 받았던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공화국』이 출간된 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그 무렵부터 최근까지 우리나라 아파트와 부동산 문제에 관한 국내 이론가들의 비판적 연구서가 꽤 여럿 나왔지만, 줄레조의 이 책만큼 큰 호응을 얻은 책도 드물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이방인이기에 가능한 객관적 시각과 유럽의 경우와의 비교를 통해 부각시킨 한국만의 특이성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프랑스의 아파트단지가 도심 외곽에 위치하는 빈민층의 거주지이자 문제 지역으로 분류되기에 ‘도시의 소외’를 상징한다면, 서울의 아파트단지는 도심에 위치할 뿐 아니라 생활의 편리성과 기능성, 높은 재화 가치로 인해 대다수 인구가 살기를 열망하는 ‘도시로의 동화’를 상징한다. 사실상 줄레조가 한국이라는 아시아 국가의 특이한 주거현실을 연구한 목적에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의 주거와 소유의 문제를 고찰하려는 의도가 주요했을 것이다. 동일한 주제에 대한 고찰이 비단 지리학이나 사회학과 같은 학문 분야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사회와의 밀접한 관계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현대미술에서 역시 주거와 도시, 소유와 계급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소재로 다뤄지고 있다. 일찍이 1970년대 초반 미국의 고든 마타-클락은 철거 전의 건물을 절단하는 계획적 파괴행위와 도시외곽의 사용할 수 없는 토지를 매입해 갤러리에서 되파는 등의 상징적 작업으로 뉴욕시의 무차별적 도시재개발과 자본주의의 폐해에 저항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한스하케는맨해튼 부동산의 대거 매입으로 임대료 상승을 주도했던 부동산업자 샤폴스키의 부동산 소유현황을 고발하는 작업으로 당시의 ‘사회 체제’에 반기를 들은 바 있다. 국내에서 역시 199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수많은 작가들이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의 기형적 주거현실과 무분별한 도시재개발을 비판해왔다.
유사한 맥락에서 사진작가 박찬민은 <intimate city>(2007-2009)와 <Blocks>(2011)라는 두 사진연작을 통해 한국의 아파트와 스코틀랜드의 공동주택을 연구해왔다. 이 과정에서 비교와 대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생겨났고 주거와 거주 일반에 대한 작가 고유의 관점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우리나라 초기 고급아파트 단지를 선도한 서울의 동부이촌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1970년생 작가 박찬민은 아파트를 전형적인 주거 형태로 받아들이며 자란 첫 세대라 할 수 있다. 그런 작가는 부친의 사업실패로 인해 고급아파트 단지에서 인근 낙후된 지역의 다세대주택으로 이사를 하고 같은 학교 다른 친구들과의 비교를 경험하면서, 한국에서 아파트란 단순한 주거형태가 아닌 부와 계급의 척도임을 절감하였다고 한다. 이후 서울 인근의 신도시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계속하여 작가는 우리나라의 주거문화와 그에 따른 부대적인 사회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작가의 첫 사진연작 <intimate city>는 서울의 마포구, 양천구, 용산구 등지와 인천과 부산 등의 밀집된 아파트단지를 찍은 흑백사진이다. 도심에 산이 있는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상 작가의 카메라에 담긴 도시는 원경의 ‘실제 산’과 근경의 또 다른 ‘인공 산’인 아파트 단지가 뚜렷한 흑백의 계조로 겹겹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21세기 한국의 풍경사진으로 탄생하였다. 전통적 방식의 흑백사진으로 보이는 이 사진들은 사실상 작가가 컴퓨터상에서 약간의 수정을 가한 디지털사진이다. 독특하게도 작가는 다른 부분이 아닌 아주 작게 보이는 각 아파트들의 상호만을 지웠다. 그는 구체적인 이름이 지워진 채 숫자만으로 표기된 유사한 아파트 건물들을 부각시킴으로써 기형적으로 획일화된 아파트의 주거환경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더불어 지극히 내밀한 개인의 삶과 생활이 이러한 획일화된 주거환경으로 인해 서로 비슷해지는 현실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동일한 주거공간의 구조와 주변 부대편의시설의 사용 등으로 매우 유사한 패턴으로 닮아가는 반면, 아파트가 지배적인 주거형태로 확대되면서 각 사람들의 생활은 철저하게 고립되고 스스로 주변과의 단절과 차별화를 자처하는 개인적인 삶으로 변모해온 역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배적 주거형태로서 한국 아파트 문화의 특이성에 천착하던 작가는 뒤늦게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떠나 그곳의 공동주택단지를 대상으로 관찰과 연구를 확장해가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를 포함한 영국의 주거형태는 원래 귀족들이 소유한 도시 근교의 대저택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나, 산업혁명과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도시의 인구집중으로 대지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고밀도 공동주택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다가구주택이나 아파트에 해당하는 이러한 플랏(Flat)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유사하게 대부분 도심지의 주택 공급을 위해 국가나 시 주도로 지어졌고, 일반 주택보다 저렴한 렌트비로 인해 주로 빈곤층이 거주하게 되고 건물관리가 잘 되지 않아 슬럼화된 곳이 많다. 박찬민의 <Blocks>는 대부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와 글래스고(Glasgow) 등의 도시 외곽 지역을 찍은 사진들이다. 20층이 넘는 소수의 고층 플랏(tower block)과 5층 미만의 중저층플랏이 밀집해있는 이 도시 외곽 빈민지역의 건물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그 중 일부가 사유화되긴 했으나 대다수가 1950년대 공영주택부지에 지어진 임대주택(council house)이다. 최근 이 중 상당수 플랏들은 시의회의 새 임대주택 공급계획에 포함되어 철거되었거나 철거될 위기에 있다고 한다. 대지 활용을 위한 고밀도 공동주택이라는 동일한 목적의 주거형태가, 대다수 인구의 꿈이자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왜 이곳에서는 대다수가 꺼리는 도시의 문제지역이 되어있는 것일까.
유럽의 공동주택 건설이 붐을 이룬 시기는 우리나라보다 대략 20여 년을 앞선다. 1950~60년대 도시로의 지속적 인구 유입과 핵가족화 등으로 초기의 높은 관심을 끌었던 이들 공동주택은 이후 대규모 건물의 관리와 노후화 등의 문제가 부각되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대거 개인주택으로 이동하면서 점차 기피되기 시작했다. 반면 서민아파트로 시작한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1970년대 초반까지 그다지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으나, 이후 고급아파트를 지향하면서 대기업의 브랜드화를 통해 중간계급이나 부유층의 큰 호응을 얻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대조적인 양상의 원인에는 유럽과 비교할 수 없는 – 특히 서울의 – 인구밀도로 인한 공동주택단지의 대대적인 물량의 공급과 수요가 주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우선적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큰 집’과 ‘새 집’에 대한 무조건적인 열망과 집을 거주 이전에 소유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이러한 식지 않는 아파트 붐을 지탱시켜주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 역시 대규모 건물의 관리와 노후화로 인한 재개발과 재건축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크고 새로운 집에 대한 열망은 작고 오래된 집을 부수고 다시 짓는 일에 무뎌지게 만든다. 사실상 이러한 무차별적인 재개발은 자연파괴와 환경문제와 도시 빈부격차, 빈민계층의 소외와 고립, 부동산 가격거품, 경기하락 등의 여러 도시 문제로 이어져 되돌릴 수 없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제반 문제와 현실을 자각한 작가는 우리보다 앞서 이러한 공동주택의 노후화와 재개발의 문제를 겪은 유럽의 상황을 들여다보고 에둘러 우리의 상황을 되돌아볼 것을 넌지시 제안한다. 이것이 북해가 내다보이는 천혜의 자연 대지에 초호화 골프장이 즐비하고 여전히 성과 대저택이 도시 전체에 흩어져 있는 나라 스코틀랜드에서 작가가 도시 외곽의 공동주택단지에 주목한 까닭이다.
사실상 <Blocks>의 건물들은 어딘지 모르게 낯선 느낌을 준다. 일견 서양의 도심 외곽에 위치한 대규모 건물로 보이지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정확한 장소나 시기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건물이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주거공간이기보다는 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대형 창고나 심지어 특정한 양식의 기념비처럼 보이고, 오늘날 사람이 거주하는 현대적 건물이라기보다는 미래에 지어질 새로운 형태의 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상은 동시대 스코틀랜드 공동주택을 찍은 이 사진들이 이러한 독특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다름 아닌 모든 건물에 창이 없기 때문이다. 전작인 <intimate city>에서 아파트의 상호를 지웠듯 <Blocks>에서 작가는 건물의 창을 지웠다. 단지 창을 지우는 일만으로 이 건물들은 고립과 단절을 암시하며 시공간을 초월한 익명의 콘크리트 블록으로 변모한 것이다.
창이 없는 집을 가정해보자. 그 집은 빛이 들어오지 않고 바람이 통하지 않으며 밖을 내다볼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창이 없는 집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인 셈이다. 물론 인공적으로 빛과 공기를 끌어오고 특수한 방법으로 바깥을 내다볼 수 있도록 만들 수 있겠지만, 그 집은 여러 면에서 좋은 집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집에 창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채광, 통풍, 조망의 기능이 부재한 물리적 불편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삶’이 부재한 집을 의미한다. 창을 지우기 전 <Blocks>의 원본 사진들에는 창과 더불어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존재하였다. 넓은 창문과 함께 난 베란다에는 집집마다 화분이 놓여있거나 빨래가 널려있으며 작은 티 테이블과 의자, 혹은 운동기구가 자리해 있다. 또한 창문을 가리기 위해 각양각색의 커튼이나 단조로운 블라인드가 달려있는 집이 있는가 하면 종이나 비닐을 붙였거나 아무 것도 없이 맨 창을 그대로 둔 집도 있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취향과 생활방식이 바로 창에 묻어나는 셈이다. 이 모든 것 이전에 창은 사람이 살고 있는지의 여부를 드러내는 최소한의 지표와도 같다. 누군가 그 집에 산다면 창은 하루에도 수 차례 열리고 닫힐 것이고 밤이면 불빛이 새어나올 것이다. 반면 아무도 살지 않은 집이라면 창은 굳게 닫힌 채 밤이 되어도 암흑을 유지할 것이다. 따라서 집의 주된 기능이 ‘거주’라면 창은 집의 상징과도 같다. 따라서 인공적인 장치의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창이 없는 건물은 사람이 사는 거주의 공간이 아니며 거주공간으로서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취향과 삶의 양식이 배제된 몰개성한 공간을 의미할 것이다. 박찬민이 <Blocks>에서 창을 없앤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는 마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나 컨테이너 박스처럼 사람들 간의 관계가 ‘차단된(blocked)’ 일종의 ’사각 덩어리(block)’로서,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체계 하에 규격화된 일종의 제품과 다를 바 없는 공동주택 혹은 아파트의 정체성을 역설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나아가 동일한 평면도에 의해 지어진 획일화된 주거형태가 일반화되고 더 이상 집을 거주공간으로만 여기지 않고 부동산이라는 재화 가치에 치중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창이 없는 집’을 통해 극단적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당대의 주거공간과 건축물, 나아가 도시를 소재로 작업해왔다. 특히 사진 분야에서는 해당 주제와 관련하여 수많은 작가들이 독일의 유형학적 건축사진과 미국의 중성적 풍경사진을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내용적 관심사와 양식적 실험을 함께 추구해왔다. 박찬민의 사진 역시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2000년대를 사는 대한민국 출신의 사진작가로서 자신의 작가적 정체성을 공고히 한다. 그 특징은 사진촬영의 전과 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먼저 사진을 찍기까지 작가는 인터넷과 서적을 통해 심도 깊은 사전조사를 한다. 유학생으로서 에든버러의 지리를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그는 19세기 파리의 만보객(flaneur)처럼 도시 이곳 저곳을 하염없이 걸어 다니기보다, 구글어스(Google Earth) 등의 인터넷상의 지도와 로드 뷰(road view)를 이용해 사전에 매우 구체적인 장면까지 계획을 하고 촬영에 나선다. 그리고 각각의 사진에 해당 건물의 위도(북위, 남위)와 경도(동경, 서경)를 나타내는 숫자를 부제로 달았다. 한편 촬영 후에는 암실에 들어가 화학약품에 사진을 현상, 인화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상에 고해상의 촬영 데이터를 띄우고 그 안에서 본인이 원하는 부분을 매우 정밀한 포토샵 기술로 지워내 자연스러운 이미지로 만든 후 디지털 방식으로 인화한다. 이렇듯 그는 디지털 기술환경이 일반화된 21세기 오늘을 사는 작가다. 그러나 그 의도나 태도는 현대도시의 생성과 모더니티를 목도하고 변화를 이끈 만보객으로서의19세기 파리 인상주의 화가들이나 양차 세계대전 사이 미국 도시의 고독과 절망을 사실적으로 파고든 에드워드 호퍼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더 이상 예술가의 관심이 자국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작가 박찬민은 한국의 주거현실과 도시문화에서 출발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더 많은 비교와 대조를 통하여 더 넓은 시각으로 보다 다양한 실제를 예술적 결과물로 제시하고자 한다. 어쩌면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의 일련의 작업들은 21세기 주거와 도시에 관해 사진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의미 있는 고찰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