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민경숙
- 민경숙 K.MIN
- 2009. 12. 16 – 12. 29
민경숙 – 매일 그리다
박영택(경기대 교수, 미술평론)
민경숙이 보내온 그림들을 본다. 먼 곳에서 온 아련한 편지 같다. 한결같이 적조하고 고독하고 쓸쓸하다. 말을 지운 자리에 고요한 이미지만이 파리하게 응고되어 있다. 언어와 문자는 부재하지만 남은 이미지는 어떤 감정과 느낌을 그대로 안긴다. 한 작가의 인성과 마음의 결, 감각의 체로 걸러낸 세상의 풍경이 거기 있다. 작가는 식빵과 먹다 남은 도넛, 일상의 사물, 건물과 집들, 나무와 누군가의 살/피부를 그렸다. 가만 들여다보면 그 모든 것들의 피부 위에는 모종의 흔적, 상처가 있다. 곰팡이가 핀 식빵, 한 입 베어 문 도넛, 무수한 칼질을 받았던 도마, 몸에 난 상처나 피부에 잠긴 초록의 핏줄, 소파 천 위로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균사, 건물에 드리운 햇살과 그림자 등이다. 그것은 사물의 표면에 서식하는 시간의 자취이자 그것과 함께했던 그 누군가의 자리다. 모든 존재는 타인의 기억을 간직한다. 그것은 우선 피부에 남아 있다. 지금은 부재하지만 한때 그것과 연동되어 있었던 또 다른 존재가 남겨놓은 흔적이자 상처다. 상처는 불가피하게 나와 다른 것이 만날 때 생겨난다.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를 숙주 삼아 산다.
비닐 팩에 담긴 식빵에 곰팡이가 피었다. 초록의 균사는 시간의 진행에 따라 점점 번져 식빵의 표면을 덮어 나간다. 썩어간다. 상처를 입은 자리에서 조금씩 차오른 죽음, 그리고 부재로의 이동이다. 말랑한 식빵의 질감에 파고든 이질적인 곰팡이는 차라리 황홀하다. 모든 존재는 그렇게 타자가 남긴 치명적인 상처 속에 소멸해간다. 둥근 도덧에 누군가의 이빨 자국이 자리했다. 그것을 베어 먹고자 욕망했던 이의 치아와 혓바닥과 침이 머물다 사라진 자리다. 빵 한 조각을 삼켰던 이의 깊은 목구멍과 식도와 생의 길처럼 아득한 창자가 떠오르는 자취다. 욕망이 슬쩍 비켜간 자리에 되돌릴 수 없는 심연 같은 구멍이 생겼다. 1,000번의 칼질을 받아낸 도마는 얇고 가는 선들을 문신처럼 간직한다. 도마의 바닥, 피부에 내려앉았던 칼 소리가 환청처럼 들릴 듯하다. 그 칼 소리는 무엇을 베고 잘라내며 떠돈 여운이었을까? 빈 위장을 채우기 위해, 한 끼의 식사를 하기 위해 무수한 칼질을 받아내야 했던 도마의 살풍경.
누군가가 앉았던 푹신한 소파는 조심스레 꺼진 자리를 통해 그/그녀의 무게와 실존의 자리를 증거한다. 어느 한 순간의 상황성을 시각화한다. 그곳 여기저기에 균사가 창궐한다. 얼룩들이 마구 번져 나간다. 기이하고 낯설다. 안락하고 편안한 소파가 일순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일상의 사물들은 그렇게 낯익고 편하다가도 문득 기억과 상처에 의해 돌연 낯설고 끔찍한 존재가 되어 나를 덮친다. 그런가 하면 가구도 없는 흰 벽, 바닥과 걸레받이 그 사이 어딘가에 다만 빛과 그림자가 만든 순간적인 자취만이 아롱지는 풍경이 보인다. 머지않은 시간에 사라져버릴 한 조각의 빛, 덧없이 스러지는 자취, 소멸하는 상처들이다. 아무것도 아닌 풍경이자 너무도 범속한 장소에서 찾아낸 이 시선은 결국 작가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 같은 이미지를 만든다. 발견해낸다. 자기 자신의 감정과 마음이, 대상을 보는 연민이, 시선이 그렇게 내려앉아 있다. 사람이 부재한 적막한 풍경 역시 그렇다. 쓸쓸하고 호젓한 집들이 나무와 함께, 따뜻한 노랑색 불빛과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는 어둠 안에 그렇게 있다. 이 세상의 사물들은, 모든 풍경은, 저마다 고독하게 자리하고 있다. 호퍼의 풍경화가 연상되는 그런 그림이다.
종이 위에 파스텔로 문질러 안착시킨 그 이미지들은 빛과 어둠의 미묘한 차이 속에서 반짝인다. 어둠에서만 빛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어둠은 빛이 있어야 비로소 자신의 캄캄함을 증거한다. 집은 풍경 속에서 아름답고 모든 사물은 누군가의 흔적 속에 제 생애를 증거한다. 조심스레 나를 둘러싼 세계를 살핀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재현하고 특정한 이념이나 논리를 구축하기 위해 찾아 나선 탐사가 아니라 다만 하루의 삶에서 만나고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나 체험이다. 작가의 동선은 방 안에서 부엌으로, 식탁과 테이블 위로 그리고 몸과 피부 사이로 떠돈다. 집을 나서서 하늘과 땅, 나무와 숲과 건물과 집들이 바라다 보이는 길가로 나서고 그 길을 걷고 그렇게 보고 접한 것들을 가슴의 갈피에 접어 넣고 돌아와 이를 그렸다. 너무 평범해서 진부하기조차 한 것들이 작가의 마음과 손끝에서 새롭게 환생했다. 약간은 흐릿하고 흔들리고 그만큼 모종의 떨림과 여운을 안기면서 이 세상이 덧없이 사라지는 순간이 화면 안에 자리 잡았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미국으로 간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가기 전까지 그토록 많이 그렸던 자화상은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보내온 이 그림들은 한결같이 작가 자신의 삶의 반경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을 그려 넣고 있다. 무엇이든지, 매일매일 그것들을 그리고 있었다. 늘/매일이라는 삶의 시간과 공간을 화두 삼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일상에 삶이 있고 미술이 있었다. 아니 미술이란 게 별것 아닐 수 있다는 묵언이다. 동시대 미술의 과도한 스펙터클과 시욕망, 현란한 논리성을 지우고 자기 주변의 일상과 사물들에 보내는 이 예민하고 감성적인 눈과 마음이 파스텔 가루와 함께 으깨지고 뭉개져, 종이 표면 위로 쓰라리게 붙어 있다.
매일, 일상이라는 평범한 시간과 공간 속에 담겨진 놀랄 만한,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있는 작은 안경에 묻혀 있는 작가의 눈이 새삼 떠오른다. 무엇을 찾고 있을까?
“나는 무엇이든지 시각적, 감정적, 심리적으로 내 관심을 끄는 것을 그리려고 한다.”(작가 노트)
애초에 무엇을 그리겠다는 인식과 그림에 대한 선험적인 의도를 지우고 자기 눈과 마음을 세상에 맡겼다. 그린다는 것이 친숙한 하루의 일과가 되었고, 그래서 매일의 생활을 담은 짧은 일기나 시 같은 그림이 되었다. 그렇게 작가는 세계를 떠다닌다. 유동한다. 모든 사물의 피부 위를 거닌다. 그곳에 난 상처를 보듬는다. 힘껏 껴안는다. 여전히 살아 있는 오늘과 그림 그리는 행위는 그렇게 구원 같고 치유 같다.
작업노트
민경숙
아름다움과 잃어버림
시간과 기억
텅빔과 감사함
온기와 친밀감
이야기와 상징
공간과 거리
멜랑콜리와 고독감
침묵과 평온
유머와 위로
정직함과 유일성
인생과 신비
은근함과 깊이
다침과 상처
단순함과 시적인 집약성
이러한 것들이 내 가슴에서 내 그림으로 전달되어지기를 원한다.
그것을 위한 그림의 소재로 음식, 가구, 빛, 공간, 건물, 나무를 선택한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 나는 무엇이든지 시각적, 감정적, 심리적으로 내 관심을 끄는 것을 그리려고 한다.
97년 즈음 미국으로 건너오면서부터 시작되고,
02년 뒤늦게 다시 돌아간 뉴욕의 대학원시절부터
내게 절대적으로 허락한 이 무엇이든 그려도 된다라는 ‘자유로움’은
한국에서 12년간 오직 자화상을 그렸던 내게 그림과 인생을 생각하는 관점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린다는 것이 좀더 친숙한 하루의 일과가 되었고
극적이거나 이야기가 많이 담긴 소설이라기 보다
매일의 생활을 담은 짧은 일기이거나 시에 가까운 형식이 되었다.
(물론 이런 과정이 어느날 쉽게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며 그 사이의 이러저러한 고통과 갈등, 헤매임, 기쁨, 해방감, 그리고 결심.. 등등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다 )
그 매일이라는 평범한 시간안에 담겨진 놀랄만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아마 내가 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 세계를 떠다닌다.
낮과 밤을.
계절과 계절 그리고 날마다 다른 날씨를.
어디에나 있는 친숙함과 또 낯설음을.